한국일보

이스라엘 판 ‘크리스마스’

2004-12-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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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절기‘하누카’이해 하기

인사담긴 카드·선물 교환, 트리대신 하누키야 불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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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팩스 길에 있는 유대인 성전.


오는 7일(화) 일몰 때부터 그 다음 주 15일(수) 일몰 때까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절기 가운데 하나인 하누카다.
이민 생활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대하게 되는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대인. 듣는 당사자들이 그리 기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 두 민족을 비슷하다고 여기는 타 민족도 많은 것 같다. 둘 다 근면하고 머리가 좋으며 치맛바람 휘날릴 정도로 교육열이 뜨겁고 가족과 전통을 중시한다는 특성이 있다. 장사 수완도 좋아 예전에 유대인이 하던 수퍼마켓, 세탁소, 의류사업을 지금은 한인들이 고스란히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은 한국인과 유대인의 전통 풍습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데 입을 모은다. 한국인과 유대인 모두 흰 옷을 즐겨 입으며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외출 시 얼굴을 가린다는 것. 또한 양 민족 모두 돌 제단을 쌓아서 제사를 지내고, 부모를 에미 에비라 부르며 장례식에서는 베옷을 입고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유대인이 유월절 기간, 문설주에 양의 피를 뿌리는 것처럼 한국인은 붉은 팥죽을 뿌린다. 유대인 대학살과 일제 36년의 아픈 역사, 그렇고 보니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공유한다. 동양의 유대인이란 별명이 괜히 생겼을까.
주전 165년, 셀류커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려 그들에 대한 탄압 정치를 실시한다. 기원 전 174년 마카비라는 유대가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의 일이다. 성전 정화 후 불을 밝힐 기름이 하루 분량밖에 없었는데 그 기름이 8일 동안 성전을 밝히는 기적이 일어났다. 후일 유대인들은 하누키야라는 9개의 가지촛대에 8일 동안 한 개씩 촛불을 밝혀가며 그들에게 향한 8일간의 놀라운 신의 기적을 기억했다.
전 세계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마음이 설레는 계절, 유대인들은 하누카를 축하한다. 성탄 카드 코너에 하누카 카드 코너가 함께 마련돼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하누카를 축하하며 기쁨의 인사가 담긴 카드와 선물을 주고받는다.
유대인 밀집 지역에 가면 가정마다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을 대신해 창가에 하누키야 불빛이 따뜻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모든 절기와 마찬가지로 하누카 역시 흩어져 있던 가족과 친구가 모여 사랑과 음식을 나누는 시간. 수브가니야라 불리는 딸기 잼이 들어있는 부드러운 도넛은 다른 때와 달리 특별히 준비한 하누카 전통 절기 음식이다.
큰 기적이 이곳에 일어났다는 가사의 ‘네스 가돌 하야 포’등, 하누카에 부르는 캐럴 격의 노래들도 다양하다. 어린이들은 꼭 우리나라의 팽이와 꼭 같은 모양의 드레이들(Draydel)을 돌리며 논다.
하누카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페어팩스의 한 성전을 찾았다. 수염을 치렁치렁 기르고 검은 코트를 도포자락처럼 휘날리는 랍비와 남자들이 하나 둘 성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 같이 뭐 그리 지은 죄가 많은 지 연신 몸을 앞으로 굽혀가며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거룩한 표정의 랍비가 다가오더니 여자들은 출입이 금지돼 있으니 자리를 떠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면 여자들은 어디서 경배를 올리냐는 질문에 그는 가운데 세워져 있는 병풍을 가리킨다. 남녀칠세부동석은 조선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지켜지고 있었던 것.
병풍 저 편으로 갔지만 기도를 드리는 여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여자는 기도 안 하나요?”라는 질문에 한 남자가 안동 양반처럼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한다. “한 집안에서 남자만 기도하면 여자는 자동적으로 기도한 셈이 됩니다.” 유대인 여자들은 좋겠다.
하누카 관련 행사들과 유대인들의 전통 선물을 팔고 있는 곳들을 한데 모아봤다. 가까이 하기가 결코 쉽지 않지만 미국이라는 양탄자를 엮고 있는 다양한 민족 가운데 하나라는 이해로 시작해 그들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어보자.

글·사진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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