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Hola! amigo 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2004-10-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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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회. 중남미인과 중남미 문화 11. 음악과 탱고 2.
초창기 tango가 탄생했을 때, 아르헨티나의 상류사회 사람들은 tango란 얘기만 들어도 인상을 찌푸렸다.
가랑이 사이에 날렵하게 다리를 넣었다 빼는 현란한 다리 동작이나 허리를 휘감는 동작, 타오르는 열정적인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하는 등 모든 동작이 섹스가 연상되도록 만들어진 상스런 춤으로 인식되었으며, 그런 것은 막노동자와 창녀들이나 추는 춤곡으로 치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Tango는 먼저 유럽으로 건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후에, 아르헨티나로 역수입되어 1920~1950년대에 아르헨티나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에 가면 유명한 tanguer?탱고를 연주하는 술집, 식당)이 여러 군데가 있어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고전적이고 전통을 지키는 tanguer?에서는, 대여섯명의 백발이 성성한, 수십년간을 tango를 연주해온 연주자들의 진지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Tango를 얘기하면서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1890~1935)을 빼 놓을 수 없다.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최고의 가수, 탱고 음악의 최고봉 등등의 찬사를 듣는 전설의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의 인기는 당시 하늘을 찔러, 유명도는 에비타와 쌍벽을 이루었고 인기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 케이블이 질투할 정도였다.
가르델은 1890년 프랑스에서 출생하여 홀어머니를 따라 아르헨티나로 이민 왔으며, 23세 되던 1913년부터 본격적인 가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이 해를 탱고의 해라 부른다. Caminito, Adi? Pampa m?, La Cumparcita 같은 그의 노래들은 우수에 찬 사랑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며 그것은 탱고 음악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가르델은 남미 순회공연 중 Colombia에서 비행기 사고로 45세 때 숨졌다. 당대 최고의 가수를 잃은 세계인들은 깊이 애통하였으며, 그의 관을 실은 차 뒤에는 수만명의 추모객들이 따랐고, 그의 무덤은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의 무덤과 같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탱고의 천재는 갔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지금도 세인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가르델이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한 탱고의 해부터 서유럽을 비롯한 미국이 탱고의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미국에서는 탱고 강사 헨더슨이란 사람이 비도덕적인 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재판정에 섰으나,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키 위해 판사 앞에서 탱고를 선보였고, 재판장은 매력적이고 예술적인 춤이라고 찬사를 보내며 무죄를 선고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아르헨티나가 tango의 본 고향임에도, tango의 원전인 La Cumparcita는 우루과이인인 Matos Rodrigues에 의하여 작곡되어, 지금도 우루과이는 자기네 나라가 tango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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