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바람 노년, 하루해가 짧아”

2004-02-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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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보건센터 다니는 김소림할머니

김소림(81) 할머니는 요즘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는 어린아이처럼 하루하루가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집 가까이 있는 셔먼웨이 양로 보건 센터에 나가면서부터 자식들 키우느라 바빠 평생 해보고 싶었지만 채 시도해보지 못한 취미 개발도 하고 친구도 사귀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
나이가 들면서 아침잠이 없어진 것이 이유는 아니다.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 거울을 보고 주름 진 얼굴에 화장을 하며 30년도 넘게 손 댄 일이 없던 옷장 문을 들친다. 오늘은 또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기대감에 가득차 고민하는 과정은 즐거운 유희다.
아침 식사도 양로 보건 센터에서 한다. 영양사가 마련한 아침 메뉴는 죽과 야채, 과일 등 건강식이 골고루 마련돼 먹거리 하나에도 건강을 생각해야 하는 또래들의 고민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오전 9시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아침 체조로 하루를 시작한다. 지도 교사의 동작을 유심히 관찰하며 동작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는 그들은 ‘뽀뽀뽀’에 출연하는 꼬마들보다 더욱 진지한 모습이다.
어려운 시절, 한국에서 자녀들을 키우느라 그녀 역시 그 시대 다른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오래 전에 저당 잡히고 난 터였다. 자식들 다 키우고 난 뒤에 하고 싶은 것 해야지 마음먹었지만 손자손녀들 키우느라 또 10여 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게 된 그녀는 요즘이야말로 그녀 인생의 황금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명상, 스트레스 관리, 요가 등 웰빙 클래스들을 그녀는 아주 좋아한다. 붓글씨와 고전 무용도 얼마나 배우고 싶어 하던 것들인가. 온 마음을 다해 붓을 휘두르고 너울너울 춤을 추며 그녀는 마지막 주어진 이 배움의 기회에 대한 감사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난 성탄 즈음, 김소림 할머니를 비롯한 원우들은 평소 갈고 닦은 고전 무용 실력을 오픈 하우스 행사를 통해 한껏 자랑하기도 했었다.
싱어롱 시간도 무척 재미있다. 강당에 모여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면 그녀의 영혼 역시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가끔씩 아낀 용돈을 모아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는 평소 갈고 닦은 노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한다. 인터넷 클래스를 택해 손자들과 이메일도 주고받는다는 할아버지들의 자랑을 들은 그녀는 머지않아 컴퓨터 클래스를 시작하려 생각하고 있다.
양로 보건 센터에 다니고부터 그녀의 병원 찾는 횟수는 현격하게 줄었다. 분명 삭신이 쑤시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었는데 노래하고 춤을 추는 동안 다음 세계를 기다리는 육체는 영혼과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원하는 취미활동을 할 때 치매도 예방되고 평소보다 건강이 좋아져 병원 신세를 덜 수 있다고 입을 모으는 노년 건강 전문가들의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닌 것 같다.
주말 양로 보건 센터에서는 빙고 게임이 펼쳐진다. 상품이라야 고작 화장지, 김, 샴푸 등 생활에 필요한 작은 물건들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집중력은 무서울 정도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도달하게 될 인생의 황혼녘. 기쁘게 일상을 보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지켜본 뒤, 여유 있는 노년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됐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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