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주관광 매출 1,000만달러 목전

2003-12-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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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의 대표적 관광업체 중 하나인 아주관광(대표 박평식·51)이 내년이면 창립 20주년을 맞는다.

지난 84년 박평식 사장이 단돈 3,000달러를 투자, 허름한 중고차로 시작됐던 ‘아주관광택시’는 이제 미주 한인업계에서는 처음으로 매출 1,000만달러 시대도 목전에 둘 만큼 성장했다. 대형버스 5대 등 13대의 차량과 LA본사 외 뉴욕, 알래스카, 서울, 베이징, 로마 지사에 60명 직원을 거느린 미주 한인사회 최대의 종합 관광·여행사로 우뚝 섰지만 대부분 한인기업이 그랬듯 아주관광의 시작도 소박했다.

동아대 졸업 후 부산에서 서점을 운영했던 박 사장은 지난 83년5월 업소를 동생에게 맡기고 로터리클럽 장학생으로 웨스턴 켄터키 대학에 유학 오게된다. 그러나 꿈 많던 유학생활을 오래가지 못했다. 부인과 갓 태어난 아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박 사장은 결국 학업을 접은 채 세 식구는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LA로 이주했다.


그때가 83년12월30일. 당시 LA한인사회는 하루가 멀다하고 팽창하던 시절, 더구나 LA올림픽 붐을 타고 본국 방문객들도 물밀 듯 밀려들었다. 이 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관광’. 박 사장은 거의 얼마 안되는 전재산을 털어 ‘아주관광택시’라는 이름으로 관광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내는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해 할 수없이 저는 손님의 양해를 받아 아들과 핏덩어리 딸을 차에 태워 2년간 공항픽업과 관광 등 정신없이 일했어요. 고생도 참 많이 했지요. 그러나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가 뒤따른다는 믿음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요.

박사장은 힘들었지만 그 때만큼 의욕이 넘친 때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86년에는 2년간의 택시업을 접고 ‘아주관광’ 상호를 달고 본격적인 관광업에 뛰어들었다. 시기적으로도 이민생활에 자리를 잡은 한인들이 여가생활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한국도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89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로 관광객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여파로 89년에는 올림픽과 카탈리나로 사무실을 옮겼으며 92년에는 현재의 올림픽 본사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상품 없는 기업이 없듯 아주관광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관광상품 개발이 원천이 됐다. 그랜드캐년, 요세미티, 라스베가스 관광이 고작이었던 80년대말과 90년대초 캐나다와 미 동부, 멕시코 등으로 영역을 확대한데 이어 96년에는 중국, 일본, 동남아, 98년부터는 남미와 유럽, 크루즈 여행 등으로 신상품을 개발했다. 현재 아주관광이 제공하는 상품은 무려 50여종.
사업확장만큼 박 사장이 관심을 갖는 분야는 사회봉사활동.

86년부터 시작한 무료 노인관광은 연례 행사로 자리잡았으며 단체나 교회에서 교통편이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버스를 제공했다. MTA파업 때도 어김없이 대형 관광버스를 풀어 불편한 노인들의 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또 월드미션 신학교와 크리스찬 투데이사에는 각각 15인승 밴을 기증하기도 했다.

지난 97년 한국이 IMF 사태로 어려움을 겪을 때는 대한항공,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조국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모국 방문 상품을 개발했으며 ‘조국에 선물대신 달러 보내기 운동’ ‘모국기 이용하기’ 캠페인 등도 벌였다.

폭동과 지진, IMF, 9·11테러와 사스, 이라크 전쟁 등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쌓아올린 신용과 단골의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박사장은 서슴없이 말한다. 관광을 다녀온 고객이 이민생활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부부와 가족간의 사랑을 되찾았다는 말을 들으면 큰 보람을 느낀다는 박사장은 앞으로도 세계 곳곳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를 개발, 한인과 한국 관광객에게 소개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213)388-7000, www.eajutour.com

<조환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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