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모의 마음 같이 가 처녀

2003-11-21 (금)
크게 작게
황순원 사모<예향선교교회>

한때 사오정이야기로 많은 젊은이들을 웃겼던 때가 생각난다. 사오정의 할머니가 길을 걸어가는데 뒤에서 따라 오던 남자가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하더란다.
할머니는 집에 도착하자 사오정에게 신나서 얘야, 내가 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남자가 나를 보고 ‘처녀’라고 하면서 따라 오지 않겠니? 내가 그렇게 젊게 보였나 부지.
사오정이 이상해서 그 다음날 할머니를 따라 나가 보았다. 그 날도 역시 할머니에게 같이 가 처녀 하며 따라오는 장사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갈치장사였다. 그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갈치가 천원이라고 하는 말을 같이 가 처녀라고 잘못 들은 것이었다.
사오정은 원래 남보다 귀가 축 처져 있기 때문에 귓구멍이 가려져 있단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의 말을 정확히 듣지 못하는 내용들로 엮어진 이야기 모음이 바로 사오정 시리즈다.
우리 부부는 일 년에 몇 차례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전화로 인사를 드리곤 한다. 그러다 보니 별로 안부 외에는 특별히 드릴 말씀도 없다. 지난번 추석 때였다. 남편이 먼저 걸어서 안부 인사를 드리고 난 후 나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어머님, 그 안 별 일 없으셨지요. 그러나 이번엔 한 가지 사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머니, 며칠 있으면 증손녀가 태어날 거예요. 나는 신나게 혼자서 지껄였다.
뭐라구 딸이 시집을 간다구?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시어머님의 목소리였다.
아니오, 어머니 증손녀가요 응, 손녀가 시집을 간다구?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으시고 혼자만 열심히 말씀하신다.
사모는 항상 교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그들과 함께 울어주는 사모가 되거라. 남편을 잘 보필하고 좋은 내조자가 되어야 한다
예. 잘 알겠습니다.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일년에 몇 차례 인사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일방적으로 똑같은 말씀을 하고는 끊으신다. 그러나 어머니는 늘 행복해 하신다. 미국에 있는 아들 며느리와 통화했다고. 비록 사오정의 할머니처럼 잘못 들었다해도 기분 좋게 들으면서 기뻐하시기만 한다면,
아들 며느리의 안부 전화를 기다리시는 어머니에게 굳이 내용을 알려 드리려고 소리를 질러가며 수화기를 붙들고 있을 필요가 뭐 있겠나.
행복은 완벽한 데서만이 오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수화기를 놓는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