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브리타니의 겨울은 따뜻했네

2003-11-1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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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가 프랑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빡빡한 그룹 여행 패키지 일정 가운데 파리 이외의 지역을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프랑스 렌느(Rennes)에서 건축을 공부하는 동생을 만나러 프랑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매번 갈 때마다 다른 지역을 여행하며 프랑스 역시 지방색 강한 것이 전라도와 경상도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 여행에서 중점적으로 다녀온 곳은 프랑스 북서부 브리타니 지방과 브레아 섬.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추억으로 그 추운 프랑스의 겨울이 봄볕보다 따뜻하게 기억될 것 같다. 겨울 시즌의 프랑스 행 비행기 표는 믿지 못할 정도로 싸다. 복잡한 파리를 벗어나 아름다운 프랑스의 전원과 섬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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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Brittany)


폴 고갱은 위대한 화가야. 프랑스 북서부 브리타니 지방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진다. ‘황색 예수’와 ‘브리타니 여인들의 춤’의 배경에 표현됐던 누런 들판과 회색 지붕들이 어떻게 그림과 꼭 같을 수 있는 건지. 브리타니는 영국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이유로 프랑스 내에서도 이국적인 지역으로 꼽히는 곳이다. 훗날 타히티 섬으로 옮겨갔던 고갱은 그가 즐겨 표현하는 이국적인 자연과 사람들을 이곳에서도 발견했던 것 같다.
숙소는 르동(Redod) 교외에 위치한 그라프(Graffe)가의 전원주택.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는 아들 여자친구의 언니를 선뜻 집으로 초대해 정성껏 식사를 대접하고 잠자리를 제공한 그라프 부부의 호의는 이기적이라고만 여기던 프랑스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려놓게 한다.
고양이 그라피티가 창문에 앉아 오후의 게으른 햇살을 즐기는 그라프 씨 집은 지은 지가 200년이 넘는다는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집’을 만들려는 가장 베르나르(Bernard)의 노력에 의해 기능미와 개성미를 갖춘 작은 성(Chateau)으로 관리돼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예리한 이미지가 작가 사강을 닮은 프랑소와즈는 만찬을 위해 리스트의 음반을 올려놓았다. 시간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커튼을 만들기도 하며 쇼팽의 에뛰드를 연습하기도 한다. 그녀와 함께 듀엣으로 연주한 바흐의 아리오소(Arioso)의 조용한 선율은 이제 그라프 가의 아늑한 공간과 함께 프랑스를 기억하게 만드는 멜로디가 되어버렸다.
황금빛 샴페인을 터뜨리며 에트랑제를 환영한 그라프 씨 부부는 브레아 섬(Ille de Brehat)에 있는 그들 가족들의 바캉스 하우스도 준비해놨다며 ‘섬’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장 그르니에가 ‘섬(Les Illes)’을 썼던 배경, 브레아 섬. 그 섬에 가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브레아 섬(Il de Brehat)


다음날 브레아 섬으로 함께 여행을 떠날 동생의 건축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온 사람은 처음 만나도 오랜 세월 알고 있던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금세 10년 지기처럼 가까워진 우리들은 내게 있어 동생,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친구의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기뻐했다. 북경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던 피에르이브의 친구, 브누와까지 도착하자 일행은 물살을 가르는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섬에는 많은 소리가 있다. 바람 소리, 새 소리, 파도 소리, 성당의 종소리, 뱃고동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 섬의 소리에 매혹돼 귀를 기울인다. 칠레로 되돌아간 파블로 네루다에게 그가 머물렀던 이태리 작은 어촌을 잊지 말라고 마을의 소리를 녹음해 보냈던 마리오도 이런 소리들을 들었겠지 상상해 본다.

바캉스 하우스에 도착하자 피에르이브는 익숙한 솜씨로 창을 가리던 나무문을 떼어내고 벽난로에 불을 지피며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있던 싸늘한 공간에 온기를 싣기 시작한다. 벽난로 옆에는 100년 전 그의 조상 가운데 하나가 손으로 직접 그린 브레아 섬의 지도가 걸려있었다.

200년이 넘는 바캉스하우스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50미터를 걸어야 하고 욕실도 헛간 옆에 위치하는 불편한 구조. 하지만 때로 불편하다는 것은 생활에 멋스러움을 더하기도 한다. 물병에 물을 길어다 부어야하는, 산사의 해우소 같은 화장실을 사용하며 프랑스 촌부가 된 듯한 감상에 젖기도 했다.
TV도 전화도 인터넷도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문명과 동떨어진 꿈같은 시간들을 보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무엇을 하며 긴 밤 시간을 보낼까 고민을 하다가 LA에서 사가지고 간 화투를 꺼냈다. 이미 고스톱을 배운 피에르이브는 프랑스어로 브누와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일단 던져. 그리고 가져와. 그 다음에는 정리해.” 하하! 그 복잡한 게임의 설명을 이렇게 단순한 언어로 정리할 수 있다니. 브누와는 머리가 좋아서인지 화투의 짝과 고스톱의 법칙들을 재빨리 이해했다.

한참 게임을 하는 데 그가 마음이 바뀌었는지 한 번 냈던 화투장을 다시 가져간다. ‘낙장불입’을 설명하다 그가 중국어에 능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재빨리 랩탑을 켜 한글 프로그램을 실행시켜‘낙장불입’에 해당하는 한자를 찾아 보여주자 그는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복잡한 고스톱을 그들은 아주 좋아했다.

매일 밤늦게까지 포도주를 마시며 파티를 벌이는 통에 아침이면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까지 늦잠을 자기도 했다. 동생이 아침에 바게트를 사러 가며 묻는다. “나 읍내에 다녀올 건데 필요한 것 있는 사람?” 빵집이 있는 마을의 중심지는 15분가량 걸어가야 하는 거리인데다 차도 없으니 시골 아낙이 된 기분에 읍내에 다녀온다는 표현을 한 것.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서는 작은 성당과 물레방아 등 마을 곳곳을 산책한다. 하루는 장화를 신고서 썰물 틈인 바다에 들어가 새우와 소라를 잡기도 했다.


지금은 한가하지만 여름철이면 사람들이 복작대는 관광지로 변신하는 곳이 브레아 섬이다. 한려수도처럼 굽이굽이 펼쳐지는 섬들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하늘의 새들이 섬에 불어대는 바람에 온 몸을 내어맡기며 유영하고 있었다. 장 그르니에는 이 섬에 머물며 ‘섬(Les Iles)를 구상했다.

“바위들, 갯벌, 물... 날마다 모든 것이 전부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로 변하는 곳이니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그로 하여금 ‘공’이라는 영원한 화두를 던져준 바위, 갯벌, 물이 똑같은 몸짓으로 내게 다가온다.“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든 공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팔만대장경도 해내지 못한 깨달음의 표현은 성스럽고 아름답다.

▲브레아 섬의 바캉스하우스에서 머물며 독특한 체험을 하고 싶으면 웹 사이트, www.holiday-homes.be/france/holiday-home.html를 방문하면 된다. 다른 지역의 바캉스하우스 임대에 관한 정보도 포함돼 있다.

■파리(Paris)

파리만큼 낭만적인 도시는 없다. 당연하지만 택시 운전사도 뽕짝이 아닌 샹송을 듣는 곳이니까.
에펠탑과 루브르 등 파리 여행의 명소를 다시 거론할 의사는 없다. 하지만 새벽녘 찾은 몽마르트의 샤크레쾨르 성당은 떠오르는 태양의 붉은 빛을 반사해 대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파리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아침나절 샤크레쾨르 성당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출 무렵의 타지마할처럼 신비가 가득한 이미지는 또 다른 감동을 전해줄 테니까.

지금 파리의 그랑 팔레 국립 미술관(Galeries Nationales du Grand Palais)에서는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렸던 작품들의 특별 전시회(Gauguin-Tahiti L’Atelier des Tropiques)가 열리고 있다. 건강한 타히티 여인들의 허리, 원초적 모성을 보여주는 풍부한 가슴은 고갱의 눈을 통해 더욱 화려하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브리타니 지방을 여행하고 난 뒤라 감동은 더욱 컸다. 바로 한 달 전까지 LACMA에 진열돼 있던 모스크바 푸쉬킨 뮤지엄의 고갱 그림 몇 점이 이 특별전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와 전시돼 있어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웠다.
그의 타이티 그림의 주제는 바로 삶에 대한 우리들의 의문들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고갱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Galeries Nationales du Grand Palais의 주소는 Porte Champs-Elysees, 3, Avenue du General-Eisenhower 75008 Paris 전화, 44 13 17 17. 지난 10월 4일에 시작된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계속된다. 그외 공연과 전시에 관한 정보는 Pariscope지를 참고하면 된다.

■퐁텐블루

파리 근교의 퐁텐블루(Fontainebleau)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 복잡한 파리를 벗어난 해방감에 가슴이 탁 터온다. 퐁텐블루는 카페왕조부터 나폴레옹 3세까지 프랑스 역대 왕들의 역사가 생생히 남아 있는 곳이요, 인물화가로 알려져 있는 오귀스뜨 르누아르가 풍경화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 자주 찾아 풍경을 그렸던 곳이다. 과거에 프랑스 왕들이 사냥을 하던 퐁텐블루의 숲에는 가을을 맞아 나뭇잎들이 노랗게 물들어있었다.
뮤지엄이 된 성 내부에는 프랑스 왕조의 생활상을 엿보게 하는 가구와 예술품들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성보다 감동적인 것은 끝없이 펼쳐지는 정원이다. 베르사이유와는 달리 인공미를 절제한 자연스런 정원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으려 애써본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한 친구의 말에 추운 겨울 땀이 나도록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루어
야 할 소원이 달리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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