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을 긋자, 굵고 뚜렷한 선을

2003-11-04 (화)
크게 작게
윤리란 한마디로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옳은 일과 그른 일의 구분은 좋은 일과 나쁜 일로 구분되고 나아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로 구분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변에서 옳은 일과 그른 일을 구분하는 선이 흐릿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오늘날 선과 악, 정당함과 부당함을 구분하는 선이 흐려지게 된 것은 우리만의 얘기가 아니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 부정과 불의와 불륜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의 주변에서부터 반윤리적인 행위가 저질러지고 있어 국정이 끝없는 혼란에 빠지고 있는 가운데 일반 시민들 중에는 결혼한 부부들이 서로 짝을 바꿔가며 난잡한 관계를 갖는 실로 입에 담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 윤리의 현주소이다. 본국은 그렇지만 교민사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민이나 원정출산 사기에서부터 마약거래, 매춘 등 교민사회에서도 부정과 불의와 비윤리는 끊임없이 저질러지고 있다.

한국인 사회는 이제 부정과 불의와 불륜을 대하는 관용의 정도가 지나쳐서 이를 조장하고 부추기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저질러지는 불의를 방관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같은 상황이 주어지면 자기도 그런 불의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 하는데 나만 못하면 나만 손해고 바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불의와 불륜에 대하여 매우 관대해지고 심지어 면역을 갖게 된 것은, 이제 더 이상 절대선(absolute good)이나 절대악(absolute evil)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상대주의(relativism)의 득세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 선과 의를 행하라고 가르치는 기독교는 처음서부터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본성을 바탕으로 분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을진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흐리멍덩한 얼치기 윤리관은 용납될 수 없다. 성경은 무관심하고 미지근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을 가장 심히 꾸짖고 있다(계시록 3장).

불의와 불륜은 사회지도자들이 각성해야 할 대목이지 개인으로서의 나 자신은 크게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무관심하고 미지근한 태도이다. 한국에서 교통규칙을 잘 안 지키던 사람도 미국에 오면 잘 지킨다는 분석이 있다. 건전한 사회는 각 개인들이 어떤 사고와 행동으로 임하느냐 하는 선택에 좌우된다.

혹자는 옛날의 윤리관으로 오늘 우리의 잘잘못을 가늠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대와 문화적 환경의 변화의 따라 윤리관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본성을 바탕으로 가늠되는 만고불변의 정의와 진리는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그른 일이고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처럼.

장석정(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