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남북전쟁의 최대 격전지 게티스버그

2003-11-0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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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포인트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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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스버그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단풍이 들어 내셔널팍 전체가 컬러풀한 파노라마를 이룬다. 게티스버그는 가을에 방문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다. 미국의 남북전쟁에 관해서는 누구나 대략은 알고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수많은 영화가 남북전쟁을 무대로 삼고 있다. 그러나 게티스버그에 와보면 영화장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다. 전쟁의 처절함이다. 남군과 북군이 수천명씩 얽혀 총검으로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는 격전을 벌인 처참함에 놀라게 된다. 한국의 6.25전쟁에 못지 않은 민족상잔과 증오가 스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링컨의 전몰장병 추도사로 잘 알려진 게티스버그는 남북전쟁 최대의 격전장으로 불린다. 3일간의 전투에서 5만명의 사상자를 냈으니 접전의 치열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만약 남군이 이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미국의 운명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역사의 죄인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에서 승자와 패자의 갈림길이었으며 북군은 처음으로 절망의 구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남군이 일방적으로 전세를 리드하고 있었다.


게티스버그는 왜 그렇게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는가.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펜실배니아주에 속해 있지만 워싱턴 DC에서 불과 2시간 거리에 있다. 당시 남군의 수도는 버지니아의 리치몬드였기 때문에 게티스버그를 빼앗기면 워싱턴 DC는 앞뒤에서 남군을 맞게 되어 링컨이 백악관을 버리고 도망해야 하는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양쪽 모두 사생결단하고 싸움에 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북군은 9만명, 남군은 7만5,000명이 배치되었다. 북군이 병력 수는 더 많았지만 남군은 기습작전의 천재로 불리는 로버트 리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전쟁터에서는 리 장군 이름만 들어도 북군의 사기가 떨어졌을 정도였으며 그의 신출귀몰함은 상대방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반면 북군측은 지휘관이 신통치 않았다. 조지 미드라는 전투경험이 미약한 장군이 정규군이 아닌 지원병들을 거느리고 부랴부랴 워싱턴에서 달려왔다.

남군의 리는 웨스트포인트 1829년, 북군의 미드는 1835년, 그랜트는 1843년 졸업생 출신이다. 그러니까 남북전쟁은 웨스트포인트 출신끼리 싸운 전쟁이라는 점에서 양쪽 지휘관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으며 후일 리 장군이 항복할 때 그랜트 장군이 너그러운 조건으로 받아들인 데에는 웨스트포인트 선후배 의리가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1863년 7월3일-리 장군은 이틀동안 북군의 방어망 왼쪽 돌파를 시도, 성공하지 못하자 일생일대의 도박을 감행했다. 그것은 병사들을 일렬횡대로 세운 정면돌파 작전이었다. 기관총과 수류탄이 없는 시대이기는 했지만 일렬횡대 정면공격은 엄청난 전사자를 각오해야 하는 돌격작전이었다. 리 장군은 남군의 맹장으로 불리는 ‘피켓’ 장군을 앞장세워 혈전을 벌였으나 북군의 완강한 저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날 하루 전투에서 남군에서만 6,000명의 전사자가 나왔으니 얼마나 처절한 백병전이었는가 상상이 된다. 미국인들은 희생을 각오한 정면공격을 Pickett’s Charge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전투에서 유래한 단어다. 북군은 2만3,000명, 남군은 2만8,000명의 사상자를 낸 미국 역사의 전무후무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명장으로 불린 로버트 리가 왜 그와 같은 무모한 공격을 시도했을까. 승승장구에 도취한 나머지 북군을 너무 얕보았기 때문이다. 북군의 상대방이 리 장군과는 비교가 안 되는 약장인데도 단숨에 승부를 내려는 그의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 그리고 북군은 게티스버그 방어선이 무너지면 워싱턴이 함락된다는 절박감 때문에 결사적인 자세로 사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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