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도쿄에서의 방황’(Lost in Translation)★★★★½(5개 만점)

2003-09-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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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남과 20대 유부녀의 ‘도쿄 우정’

이국에서의 우연의 만남과 관계 맺음 그리고 그것이 영향과 잔상을 깊고 민감하면서 또 통찰력 있게 그린 아름다운 작품이다. 나이는 다르나 모두 개인적 위기를 맞은 두 남녀가 낯설고 물선 타국에서 만나 우정을 연결, 뜻밖에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상당히 철학적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야기가 거의 없다시피 한 내면 성찰의 영화인데 작품 의도가 진지하고 진실하며 또 거울로 인간의 방황하는 마음을 비추어 보듯 명료해 깊은 애착이 간다. 볼 때보다 보고 나서 한참 뒤에 감동을 느끼게 되는 여운의 영화다


HSPACE=5


놀라운 것은 영화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사람이 아직도 앳된 소피아 코폴라라는 점. ‘대부’를 만든 프랜시스의 딸인 소피아는 ‘대부 3’편에 나왔다가 엉망인 연기 때문에 비평가들로부터 큰 모멸을 당했었다.

그는 연기를 버리고 ‘처녀들의 자살’로 감독으로 데뷔, 솜씨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이 영화 역시 젊은 여인들의 내면을 투시한 것이었다. 젊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삶과 인간 내면의 불협화음과 고독과 위기를 아낌없이 포착해 은근히 떠올려낼 수 있는 것인지 놀랍다.

도쿄의 파크 하이야트 호텔. 중년의 밥(빌 머리)은 산토리 위스키 광고를 찍으러 이 곳에 왔다. 그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결혼 2년째인 20대 초반의 샬롯(스칼렛 조핸슨)은 일밖에 모르는 사진사 남편 존(지오바니 리비시)을 따라온 것.

그런데 밥은 지금 중년의 삶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집의 아내와의 전화통화 끝에 그 누구도 그 흔한 “아이 러브 유”를 말하지 못한다. 철학을 전공한 샬롯은 아직 삶의 좌표를 제대로 찾지 못해 괴로워하면서 갈등한다. 이국이어서 두 사람의 내적 방황은 더 가차없을지도 모르겠다.

둘은 불면의 밤에 시달리다 호텔의 바로 올라가 각기 따로 술을 마시다 서로 알게 된다. 둘은 특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까이 접근하면서 우정을 서서히 맺어간다. 밥과 샬롯은 시내관광을 하면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 새 경험을 하고 신나게 노래도 부른다.

밥과 샬롯의 우정은 며칠간의 만남 동안 심연처럼 깊어지는데 그것이 나중에는 우정과 애정의 경계를 알 듯 모를 듯 넘나들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침내 밥이 떠나는 날 공항으로 가던 밥이 갑자기 차에서 내려 샬롯을 끌어안고 속삭인 말은 무슨 내용일까. 샬롯의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내 눈과 가슴이 찡한 전율감을 맛본다. 이별인데도 희망을 감각케 한다.

언어 불통에서 오는 희극을 심오한 내용에 살짝 입힌 좋은 영화다. 파격적 캐스팅인 빌 머리의 감수성 예민한 연기와 함께 조핸슨도 자연스럽고 침착하게 잘한다. 도쿄의 명멸하는 네온이 아름답다. R. Focus. 일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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