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족없는‘빈자리’인정으로 채웠지요

2003-09-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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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고 한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은 때로 유행가 가사도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흩어져 있던 가족들을 한 곳으로 불러모으는 명절 한가위. 꿈에도 잊지 못하는 가족들을 태평양 너머 두고온 하숙생들은 대체 어떤 추석을, 그리고 어떤 주말을 보내고 있는 걸까.
LA의 하숙집들은 줄잡아 50개 정도. 적게는 서 너 개로부터 20여 개의 방을 갖추고 있는 하숙집은 시설과 규모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평균 입주비는 한 달 400-700달러 선.
개인 침실에는 침대와 책상 등 기본적인 가구가 딸려 있고 화장실과 샤워 시설은 2-3인이 공동으로 이용한다. 가정집 독방 렌트와 다른 점은 아침, 저녁 식사가 제공된다는 것과 동료 하숙생들과의 공동 생활로 요약될 수 있다.


독자들에게 지면으로 하숙집을 소개하기 위해 하숙 얻을 사람보다 더 머리를 싸매고 한국일보의 안내광고를 훑어 본다. ‘LA에서 가장 깨끗하고 조용한 집. 음식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란 광고 문구에 귀가 솔깃해진다.
오한나씨와 오윤근씨 내외가 운영하는 ‘사랑의 집’을 찾은 주말 저녁. 대형 TV가 설치된 리빙룸에는 두 세 명의 하숙생이 TV 스포츠 중계를 지켜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한쪽 구석의 두 남자는 머리를 땅으로 향하고 뭔가에 깊이 몰입해 있는 모습이다. ‘장받아! 이 사람아’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장기판이 신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수 있었다.
사랑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20여 명의 하숙생은 18세의 유학생으로부터 67세의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그 연령폭이 아주 넓다. “주로 유학생, 주재원이 많아요. 박사 학위 마치거나 파견 근무가 끝나면 귀국하죠. 가족들이 전부 이민 오기 전에 미리 와서 미국 생활에 대해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구요.”
갑작스런 이혼으로 혼자 살게 된 남자들은 하숙집에서의 공동 생활로 헤어짐의 아픔을 극복하기도 한다. 그들의 입주 기간도 각양각색. 짧게는 2-3일로부터 길게는 2년이 넘도록 오래 살고 있는 하숙생들도 있다.
오한나 씨는 잠자리와 끼니만큼 필수적인 미국 생활 정보를 하숙생들에게 일러주는 정보통이기도 하다. 오늘로 입주한 지 4일째 밖에 되지 않는 신참내기 김진태(43·선교사)씨는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한국일보의 안내광고를 보고 사랑의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생전 처음 미국 땅을 밟으니 모든 게 낯설기만 하더라구요. 하다못해 전화 거는 법도 몰라 헤매었죠. 하숙집 아주머니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헤쳐나갔을까 싶어요. 자리 잡으면 꼭 이 은혜 갚을 겁니다.”
가족을 모두 한국에 두고 온 이복노(54·의류업)씨는 벌써 2년째 하숙 생활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따로 밥을 해 먹지 않아도 되니 좋고 말상대가 있어 외롭지 않다는 것이 하숙생활을 계속하는 이유다. 이곳에서 만나 정 들었던 하숙생 가운데는 아직까지 연락을 계속하는 친구도 제법 된다.
장현태(29·회계 사무소 근무)씨는 룸메이트가 타주로 떠나고 난 뒤 혼자 사는 게 너무 외로워 하숙집 입주를 결정했다.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다른 입주자들이 선배나 형처럼 친절하게 인생의 조언을 들려주는 것이 고맙다. 키가 껑충한 브라이언 박(21·학생) 군은 하숙집의 막내둥이. 아들 같은 느낌에 오한나씨는 어머니처럼 반찬을 밥 위에 직접 놓아주기도 한다.
“우리 집 하숙생이었는데 USC에서 박사 학위 받고 귀국했지.” 바쁜 시간을 쪼개 하숙생의 졸업식에 꽃다발을 들고 간 오한나씨가 박사 가운을 멋지게 입은 하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추석이면 과일 바구니 들고들 찾아와요. 설에는 가족들과 함께 세배도 오고.” 미국 생활 초기, 낯설기만 한 새 하늘과 새 땅에 선 불안감을 도닥거리고 함께 했던 하숙집 아주머니였기에 살 만해졌을 때 더욱 생각이 나는 것이리라.
6시30분께가 되자 각자의 방에 있던 하숙생들이 하나 둘 식당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 반찬은 깻잎 무침과 흑돼지 삼겹살 구이. 식탁 가운데 그릴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폴폴 나며 식욕을 자극한다.
“이 깻잎 무침이 얼마나 몸에 좋은 건데. 많이 먹어요” 하며 접시에 반찬을 손수 덜어주는 오한나 씨는 따뜻한 사랑이 그리운 하숙생들에게 어머니이며 누이 같은 존재. 매일 다른 반찬을 준비하느라 몸이 분주하지만 하숙생들이 맛있게 먹어줄 때의 보람으로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단다.
천도 복숭아를 깨끗하게 씻어 양푼에 담아놓은 모양이 어찌나 탐스러워 보이는지 평소 과일에 손을 잘 대지 않던 서응석(67) 씨도 복숭아를 덥썩 집어 한 입을 꽉 깨문다.
“가끔씩 몸이 아픈 하숙생들은 죽을 쑤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해요. 그러면 정말 정성껏 끓여준다우.” 하숙생들의 병은 결국 외로움이 원인이 아닐까. 그녀의 정성어린 간호로 외로움이라는 불치병은 씻은 듯 치유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리빙룸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는 하숙생들을 바라보는 가슴이 한가위 달처럼 둥글고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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