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자 대화여행… 축복 한아름

2003-08-22 (금)
크게 작게
송재훈(40)씨는 최근 아들 대니엘 송(12)군과 함께 미국 서부지역을 여행했다.
이 여름이 가기 전 아들과 단둘만의 장기여행을 계획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만년 응석받이일 줄 알았던 아들이 이제 내년이면 틴에이저가 된다.
자신도 지나왔던 그 나이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쉽게 상처를 받고 유난히 감성이 예민한 시기. 이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아들과 눈앞에 펼쳐지는 대자연을 함께 느끼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지난 열흘간은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축복된 시간이었다.
물론 우리의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여정이지만 집을 떠난 여행길은 일상보다 더 진솔하고 무게 있는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거대한 세코야 나무 숲, 끝없이 펼쳐지는 데스밸리의 사막, 꽃보다 아름다운 초록빛을 맘껏 향유했던 요세미티,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장엄한 그랜드캐년, 그의 마음을 빼앗아간 아름다운 도시 샌프란시스코. 함께 밟은 여행지가 늘어감에 따라 부자간의 대화 역시 깊이를 더해간다.
여행 중 그는 항상 커 보여야 한다는 아버지로서의 부담감을 내려놓고 아들에게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 좌절과 아픔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아들 역시 그의 꿈과 소망, 세상을 향한 애정 어린 호기심을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해질 무렵 캠프장에 도착해 텐트를 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 하나하나는 그들 부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거룩한 행위였다.
대자연에서의 캠핑을 통해 세상에 헤쳐나가지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대니엘뿐만이 아니다.
가끔씩 밥이 설익어도 LA에서 준비해간 밑반찬에 일회용 국물까지 마련하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캠프파이어를 앞에 두고 그들은 함께 나누었던 12년의 세월을, 그 아름다운 추억들을 함께 이야기한다. 세상의 여러 인간관계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로 만난 이 인연을 그들은 더할 수 없을 만큼 소중히 여긴다.
그는 어린 아들을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깨어 있는 아빠다. 그는 대니엘을 28세 이후에 태어난 인생의 동역자이자 친구, 후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유전인자를 이어받아 많은 부분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이다.
여행이 필요한 것은 아들만이 아니었다. 살면서 기억하고 싶은 것보다는 잊고 싶은 것들이 늘어가는 것이 중년의 삶. 그렇게도 그를 괴롭히던 상념들은 여행을 통해 마법처럼 망각되었다.
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망각이라는 것은 한정된 뇌의 용량에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을 때 어쩔 수 없이 이전의 정보를 버리는 작업이라고 하던데,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새 정보가 그의 머리 속에 들어왔을 때 그는 오래된 정보를 미련 없이 레테의 강 저편에 버릴 수가 있었다.
<박지윤 객원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