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재철 목사의 짧은 글 긴 여운 아내의 무쇠다리

2003-07-2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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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는 본래 그리스 신화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가 로마 시대에 로마 신화의 베누스(Venus)와 동일시되었고, 이것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비너스로 발음이 바뀐 것입니다. 사랑과 미의 상징인 만큼 비너스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조각으로 남겨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밀로의 비너스입니다. BC 2~1세기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이 밀로의 비너스로 불리는 것은, 1820년 에게 해의 작은 섬 밀로스(Milos: 프랑스어로는 밀로)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주 터키 프랑스 대사 리비에르가 매입하여 루이 18세에게 헌납하였고, 지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높이 2.04미터의 밀로의 비너스는 분명 상의를 벗은 반라건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전혀 관능미에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친근함과 따뜻함-이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입니다.
몇 해 전 아내와 함께 루브르를 찾았을 때입니다. 밀로의 비너스 등 쪽을 보던 아내가 말했습니다. “평소 일을 많이 한 여잔가 봐요.” 그러고 보니 앞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비너스의 허리와 둔부는 매우 굵고 강해 보였습니다. 거울 앞에서 자기 치장만 하는 여자라면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강인함이었습니다. 반라의 비너스에서 관능미 대신 따뜻한 친숙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셈이었습니다.
얼마 전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1인 몇 역을 하느라 파김치가 된 아내가 퉁퉁 부은 다리를 쓸어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제가 물었습니다. “날씬한 내 다리와 바꾸겠소?”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의 이 무쇠다리가 아니면, 어떻게 제게 주어진 이 많은 일들을 다 할 수 있겠어요?” 아내의 그 말에 밀로의 비너스가 떠올랐습니다. 삶과 무관한 아름다움은 단지 꾸며진 위장일 뿐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오직 삶 속에만 둥지를 틉니다. 그래서 무쇠다리의 아내가 제게는 밀로의 비너스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2003년 7월 ‘쿰회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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