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우슈비츠는 침묵으로 고발한다

2003-07-08 (화)
크게 작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의 경주로 불리는 크라카우 교외에 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또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기차로 8시간 걸린다. 유로열차와는 다르기 때문에 기차타면 고생한다. 될수 있는 대로 비행기편이 좋다.(이번 취재에서 멋도 모르고 기차편을 택했다가 무척 당황했었다.)
폴란드의 지도에는 아우슈비츠라는 마을이 없다. 아우슈비츠는 나치가 지은 수용소 명칭이고 마을 이름은 ‘아우스비에첨’이다. 아우슈비츠는 현재 폴란드의 국립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박물관직원만이 가이드를 할수 있다. 입장료는 없다.



나치는 유럽의 수많은 곳을 놔두고 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대량학살장으로 선택 했을까. 왜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체포현장에서 처형하지 않고 아우슈비츠까지 데려와 개스로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을까. 나는 평소 아우슈비츠 영화를 보면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몇가지 있었는데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번에 의문이 풀렸다.


나치가 아우슈비츠를 대량학살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유럽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각 나라에 산재해있는 유대인과 정치범을 처형할 경우 지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다. 교통편의와 수송연료를 아끼기 위한 독일인 고유의 경제적인 관념이 작용한 것이다.
왜 개스를 사용했을까. 여기에는 어처구니 없는 나치의 양심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수용소 책임자였던 루돌프헤스는 전범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박물관에 기록 보존).

“아히히만이나 나는 유대인 대량살상 방법에 대해 아이디어가 없었다. 그러던중 소련인과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대한 개스처형 실험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었다. 자이클론 B개스면 수백만명도 처리할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항상 유대인 처형에서 어린이와 부녀자 총살에 대해 고민해왔다. 게다가 총살집행하는 SS 대원들도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개스처형은 나를 마음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유대인 처형장으로는 아우슈비츠외 트레블링카, 벨젝, 소비보등이 선택되었으며 벨젝에서도 60만명이 죽었다. 그런데 아우슈비츠가 유달리 유명한 것은 다른 수용소들은 나치가 후퇴하면서 파괴해 증거인멸 시켜 버렸으나 아우슈비츠는 소련군 제60사단이 예상을 넘어 너무 빨리 진주하는 바람에 SS나 게슈타포가 미처 폭파시킬 틈이 없었다. 또한 아우슈비츠가 가장 ‘죽음의 공장’ 규모가 컸고 다국적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 와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폴란드인 학살(75000명)이 강조되어 있고 유대인 홀로코스트 박물관이라기 보다는 폴란드 레지스탕스 기념관 같은 냄새가 짙은 점이다. 이는 공산치하에서 소련군의 아우슈비츠 해방과 폴란드인의 수용소 내에서의 영웅적인 투쟁이 너무 강조된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품었던 한가지 의문은 결코 풀리지 않았다. 2차대전에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제공권을 쥐고 있었는데 왜 아우슈비츠를 폭격하지 않았느냐는 점이다. 많은 유대인을 구할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해 폴란드인 박물관 직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사진 많이 찍었느냐”고 동문서답만 되풀이했다.



‘죽음의 종착역’으로 불리운 빌케나우.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으로 뻗은 이 철도는 개스실 앞에서 멈추도록 설계되었으며 유대인들은 내리자마자 샤워장이라고 속인 개스실로 들어가 희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때 150만명이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지금은 폴란드의 국립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폴란드 학생들의 필수여행코스다. 부모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한것을 추모하기 위해 들렀다는 헝가리인 중년부부가 수용소 건물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꺼번에 수천명씩 죽인 개스처형실. 영혼들을 위로하는 촛불이 켜져 있다. 샤워장처럼 되어있으나 샤워꼭지에서는 독개스가 흘러나왔다.




오리지널 건물인 아우슈비츠 1 수용소와 전기 철조망. 아우슈비츠는 원래 정치범 수용소였으나 유대인 학살을 위해 아우슈비츠 2 빌케나우, 아우슈비츠 3 모노비차를 증설했다.



아우슈비츠를 견학하고 있는 독일학생들이 박물관 안내자로부터 자신들의 선조인 나치의 만행을 설명듣고 있다.


수용자가 그린 당시의 아우슈비츠 정문. 일하러 나가는 장면으로 뒤에서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다. 키 작고 땅땅한 죄수는 유대인 아닌 잡범으로 ‘카포’라는 조장으로 행패가 심했다.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정문. “일하면 자유스러워 진다”는 그 유명한 수용소의 구호 밑으로 관광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폴란드인이 제일 많고 다음이 독일인, 그다음이 유대인 순서다. 서유럽보다 동유럽관광객이 붐비는 것이 특징이다.


글·사진 이 철 주필


유대인들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개스실로 향했다. 이를 위해 개스실 바로 앞까지 철도가 연결되어 있었다. 캄캄한 한밤중에 열차를 도착하게 한후 어영부영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속에서 샤워를 한다고 옷을 벗긴 다음 그 자리에서 개스실로 들어갔다. 개스실에는 샤워꼭지까지 설치되어 있어 모두 샤워장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 샤워 꼭지에서 물이 아닌 독개스가 나올 줄이야. 악랄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샤워하고 나온 후 자기소지품을 쉽게 찾을수 있도록 표시를 해놓으라고 주의사항까지 전달해 이들의 마음을 교묘히 안심시킨 사실이다. 집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보석등 값나가는 귀중품을 모두 다 들고 나왔으며 이들이 개스처형된뒤 SS는 짐을 뒤져 돈과 보석을 모두 챙겼다.

아우슈비치에서 희생된 유럽인들은 150만명으로 추산된다. 소련은 3백만명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이 숫자는 종전후 소련이 처형한 폴란드정치범을 슬쩍 얹어서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0만명 희생자중 90%가 유대인이고 폴란드인이 75,000명, 집시가 30,000명 ,소련포로가 2,5000명 프랑스 레지스탕스등 기타가 10,000명으로 되어 있다. 개스실에서는 하루 4,700명까지 처형한 적이 있었으며 개스가 퍼진지 5분만에 모두 숨을 거뒀다. 이 장면을 재생한 석고 인형들이 수용소에 전시되어 있는데 개스실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표정은 가히 충격적이다.

가스실 처형은 1944년 헝가리 유대인 집단학살이 피크며 주로 아우슈비츠2로 불리는 빌케나우 개스실에서 자행되었다. 나중에는 시체 화장하는 벽난로가 모자라 밖에다 쌓아놓고 휘발유를 끼얹어 태웠다. 이장면을 알렉스라는 그리스계 유대인이 목숨을 걸고 찍는데 성공해 유일 전범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사진도 안찍고 등록도 하지 않은채 곧바로 개스처형 했기 때문에 지금도 정확하게 몇명이 이곳에서 희생되었는지 알길이 없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아예 등록부도 만들지 않은 것이다.



개스실에는 약 450명의 시체를 처리하는 ‘손더코만도’라는 잡역부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치의 만행과 관계자 이름을 일일히 적어 알루미늄 통에 넣은후 땅에 파묻었다. 그리고는 자신들도 처형될 것을 감지하고는 44년10월9일 폭동을 일으켜 개스실을 한개 불태우는데 성공했다. ‘손더코만도’ 450명 전원이 사살되었으며 이 사건에 중심역할을 한 유대인 여성 4명은 수용소에서 영웅이 되었다. 이것이 아우슈비츠에서 나치에 집단 저항한 유대인의 유일한 케이스다. 그 이전에는 양처럼 끌려가 만세한번 외치지 못하고 참혹하게 희생되었다.

<폴란드 아우스비에첨에서>
chullee@koreatimes.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