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떼를 치며 “레아더라!”

2003-04-3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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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목표와 기쁨은 전한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에 오래 기억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마음에 각인된 말씀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저는 한 주에 대략 5편에서 6편의 설교를 합니다.

이 중 얼마가 성도의 가슴에 남아 있을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기억되는 특정한 말씀보다는 말씀이 전해지는 순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성도들의 생활에 서서히 젖어들어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2001년 부흥회 때 저희 교회에 오셨던 강사 목사님이 전해주신 말씀 중에 제가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레아더라!”입니다. 야곱에 관한 이야기에 나오는 한탄의 소리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눈치 밥을 먹던 시절, 라헬이라는 사촌 동생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외삼촌은 딸을 미끼로 일 잘하고 똑똑한 조카를 착취하여 7년간을 부려먹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날 기쁜 마음에 술 취한 야곱의 첫 잠자리에 라헬의 언니 레아를 들여보내는 꾀를 부립니다. 이 꾀에 넘어간 야곱이 7년간의 수고가 헛것이 되는 순간에 터뜨렸던 감정의 폭발음임입니다. “레아더라!” 정신없이 물질만을 추구하던 인생이 헛된 결말을 맞이할 때 후회하면서 토로할 회한의 소리가 “레아더라”입니다.


대가가 확실한 일에 투자된 수고는 오히려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가가 불확실한 일에 쉽게 투자하지 않습니다. 가장 속상하는 일이 대가가 확실한 줄 알고 ‘올인’했는데, “레아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부활의 계절에 저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확실한 일을 위해 멋지게 전폭적으로 투자된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유혹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 분이 행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었고, 확실한 보장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불신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도 확실한 약속 있는 일에 별로 투자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레아더라”하고 한탄할 뻔한 그 일에 빠져, 그 곳에 ‘올인’한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성경 말씀을 혼자서 중얼거려 봅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3:9)

우리를 굳게 해주는 것에 확실한 투자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한 규 삼
(세계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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