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재철 목사의 짧은 글 긴 여운

2003-03-1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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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타령

자동차를 타고 가며 라디오를 켜자 가요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노래를 가만히 듣던 막내 승주(초등학교 5학년)가 물었습니다. “왜 우리나라 가요는 거의 사랑타령이에요?”
이 질문에 대해 아내가 답했습니다. “그건 사랑하기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란다.”
정말 그렇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사랑할 수만 있다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이 소설이나 음악 그리고 영화의 단골주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사랑으로 인해 상처를 주거나 받는 일도 없을 것이요, 크리스천이 사랑해야 할 자를 바르게 사랑하지 못함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기에, 이와 관련하여 크리스천 치고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가 드물 정도로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랑타령만 늘어놓아야 할 정도로 사랑은 아예 불가능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고의 전환과 더불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사랑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이렇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란 ‘상대의 유익을 위한 이타적 행위’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그릇된 이해가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한 사랑이라면 곧 나의 손해, 나의 헌신과 동의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하지 않으면 나에게 유익이 없음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유익’을 위함임을 분명히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은 부메랑과 똑같습니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던지면 반드시 그로부터 미움이 돌아오게 됩니다. 반대로 사랑을 쏟으면 사랑으로 되돌아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에게 사랑은 힘든 일일 수 없습니다. 사랑이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고 가꾸는 길이 달리 없음을 아는 까닭입니다.

-2003년 2월 홍성사 ‘쿰회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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