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텃밭서 맛보는‘수확의 희열’

2002-10-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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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람의 주말나기 제인 김씨 <주부·컴퓨터시스템 엔지니어>

결실의 계절 가을. 제인 김(42·컴퓨터 시스템 엔지니어)씨의 텃밭에도 계절은 찾아와 커다란 호박이 넝쿨째 굴러다니고 있다. 어린 애 머리만 한 애호박은 따다가 새우 젖 넣고 볶아먹었더니 아주 맛있었다.
두 세 달 따지 않고 놔둔 것은 신데렐라를 태우고 무도회장으로 떠났던 마차로 변한 호박처럼 큼지막하고 색깔 또한 누르스름한 가을빛이다.
도시에서 자라 흙 한 번 만져본 일이 없는 그녀가 ‘전원일기’의 주인공처럼 농사를 짓게 될 줄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젖소 냄새 퐁퐁 풍기는 치노 힐의 외곽지역에 주택을 구입했던 것이 4년 전의 일. 당시만 하더라도 집 가까운 곳에 한국 마켓은 눈 씻고 봐도 없던 때였다. 뒷마당에 야채를 심으면 마켓에 가지 않고도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도대체 누구에게 들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길로 깻잎, 고추, 파, 부추, 호박 등 각종 야채의 씨를 사다가 뒷마당에 뿌렸다.
자연은 정직하다. 땅에 심겨진 씨앗은 물과 태양 빛을 받자 앙증맞은 싹을 내주었다. 다닥다닥 숨 쉴 틈도 없이 붙어 있던 작은 싹들을 띄엄띄엄 옮겨 심어 충분한 공간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 그리고 물주는 것을 제외하면 호박과 야채를 키우기 위해 그녀가 했던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지난여름, 그녀의 텃밭에서는 깻잎과 고추가 대풍이었다. 쌈장 맛있게 만들어 쌈 밥을 해먹기도 하고 밥에 찬 물 말아 밭에서 난 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기도 했다. 호박잎 쪄서 보리밥 얹어 싸먹었던 식사의 맛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
오늘은 밭에서 애호박 두 개와 늙은 호박 하나를 딴다. 애호박으로는 된장찌개와 호박전, 그리고 볶음을 만들 예정. 늙은 호박은 속을 모두 파내고 낮은 불에 오랜 시간 끓인 후 설탕과 찹쌀 경단을 넣어 호박죽을 쑤었다. 아침마다 얼굴이 붓는다고 고통을 호소하던 친구 생각이 난다. 호박이 부종에는 최고라고 하던데.
시어머니는 호박을 얇게 썰어 좋은 햇볕에 내다 말리신다. 말린 호박을 넣고 떡을 만들면 달달한 것이 아주 맛있을 것 같다. 호박 김치 또한 그녀에게는 생소한 반찬이지만 시어머니에게는 기본 아이템.
제철을 만난 야채는 교회 갈 때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친척집에 나들이 할 때마다 따다 준다. 그녀 하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일년 내내 신선하고 고소한 맛이 나는 야채를 무료로 즐길 수 있게 됐다.
농사짓는 조상을 두어서일까. 흙을 만지고 풀 포기를 가꾸는 작업은 늘 즐겁다. 쫓고 쫓기는 바쁜 일상 가운데 거칠어졌던 감성은 텃밭에 앉는 순간, 잔잔한 호수가 된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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