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레인 정씨 유럽 배낭여행기<3>

2002-08-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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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

이탈리아에서 우린 스위스를 거처 독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우선 젖은 옷 갈아입고 산뜻한 기분으로 자리를 잡았다. 뒷좌석엔 미국에서 온 대학생 배낭족들이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오리지널 미국식 영어를 들으니 반갑다. 그들도 우리처럼 여행가이드 북을 들고 있다. 창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호수와 그 위에 떠있는 구름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비가 오니 뜨뜻한 라면 국물이 먹고 싶다. 가방 안에 비상용으로 가져온 컵라면이 있는데 생각이 간절하다. 옆의 친구가 며칠간 피자 조각과 스파게티만 먹었는데 라면을 꼭 먹어야겠다며 뜨거운 물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란다. 이 일을 어쩐담. 마침 커피와 스낵을 파는 승무원이 지나간다. 아줌마가 온갖 애교를 부리며 Hot Water를 부탁하자 기다리란다.

잠시 후 갖다준 물은 라면이 익을 정도의 뜨거운 물은 아니었는데 이것도 감지덕지하며 우린 감격해서 필요하지도 않은 스낵을 이것저것 샀다. 친구는 참을 수가 없다며 국물을 홀짝 마시고는 너무 맛있다고 호들갑을 떤다.
독일에 다시 돌아왔다.


8박 9일간의 여행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그동안 객지에서 탈 없이 잘 지낸 것이 참 감사하다. 그동안 일과 가정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8박 9일 동안의 휴가가 꿈처럼 지나갔다. 편두통으로 고생을 했는데 한번도 머리가 안 아팠다. 이것도 신경성이었나.

직장과 일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 뒷바라지에서 해방되어 나만의 시간, 그것도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한 여행길이 정말 유쾌하고 즐거웠다. 여행기간만큼은 사모님, 지점장님, 아무개 엄마 등의 호칭에서부터 벗어나 잊어버렸던 내 이름 석자, 허은숙으로 살았다.

나는 이제 다시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여행을 통해 재충전된 에너지를 가지고 전보다 더 열심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것이다.

매여진 직장이 있었기에 휴가가 더 소중했고 두고 온 가족이 있었기에 여행이 더 의미가 있었음을 안다. 이제 나는 다시 제2의 고향 LA로 돌아간다.
아니, 23년간 내 삶의 희로애락이 있었던 미국 땅으로 간다. 낭만적이고 아기자기한 유럽을 뒤로하고 풍요의 땅,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거대한 대륙 미국으로 돌아가 새롭게 또 나만의 시간들을 개척할 것이다. 아마도 유럽의 파란 하늘과 푸른 산하를 그리워할 테지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을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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