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십자수 놓는 윤진아씨

2002-07-12 (금)
크게 작게

▶ 이 사람의 주말나기

’책 읽는 여인’, 그리고 ‘수놓는 여인’들의 초상은 아름답다. 그녀들이 아름다운 것은 아리따운 얼굴 때문이 아니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해 자아가 녹아 없어진 상태는 우유 빛 피부, 단아한 자태보다 더한 아름다움의 조건이 된다.

수를 놓는 윤진아(31)씨의 모습은 아름답다. 데이트하기에도 바쁠 시기의 그녀가 십자수를 취미로 시작하게 된 것은 대한항공 승무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행 떠난 도시에서 구경 다니고 샤핑 다니기도 하루 이틀이지, 뭔가 생산적인 소일거리가 없을까 싶던 차에 독일 비행 중 만난 여인들의 모습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햇살 따뜻한 뜰 앞에서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장면은 화가들이 붓을 들어 표현하고 싶어할 만큼 고왔다. 도대체 그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럽 각지에서 책 읽는 것만큼 자주 접하게 되는 십자수 놓는 여자들의 모습. 그녀들은 찬찬히 손을 놀려 이니셜이 들어간 손수건과 키 체인은 물론, 옷과 대형 액자 등 집안을 장식하는 물건들까지 척척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길로 천과 바늘, 그리고 실을 사들고 새로운 취미를 시작한다. 머리 쓸 것도 없는 반복 작업. 프랑크푸르트에 있건, 파리이건, 비행기 안에 있을 때나 지하철을 탈 때도 십자수는 그녀의 짜투리 시간들을 엮어 쓸만한 것들로 만들어냈다. 키 체인, 화병 받침, 쿠션, 테이블 보, 액자, 이불, 약 5년 정도 이렇게 남는 시간에만 수를 놨는데도 수를 놓아 완성한 작품들이 한 보따리다. 덕분에 이제 혼수 따로 장만하지 않고도 시집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완성된 작품을 보면 저걸 어떻게 하나 싶지만 10분 정도만 배우면 아무리 손재주 없는 남자라 할지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손쉬운 것이 십자수. 탤런트 최수종도 십자수를 한다나. 하희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겠거니 싶다.
오색의 실을 놀려 헝겊 위에 수를 놓으면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것만큼 촘촘히 패턴의 문양이 살아 나오는 과정이 마법처럼 신비하다. 십자수를 놓던 여인들은 죠르주 쇠라 이전에 점묘법의 기법을 알았던 이들이 아닐까. 초창기 헬로우 키티 모양이나 수놓던 그녀는 요즘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입맞춤의 본을 떠서 수로 옮기는 과정을 하고 있다. 그림 사진 위에 트레이싱 페이퍼를 놓고 본을 떠 다시 헝겊에 먹지를 대고 베낀 다음 그림의 색깔과 같은 실을 사용해 말 그대로 헝겊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게다. 일단 겁 없이 시작은 했지만 언제 다 마치나 한심스러웠는데 벌써 제법 그림의 형상이 나타난다.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는 보편적인 진리는 십자수를 놓으면서도 깨달을 수 있다.


<박지윤 객원기자>jypark@koreatimes.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