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엄숙 파괴’, 자유-낭만 어우러진 ‘문화 만찬’

2002-07-05 (금)
크게 작게

▶ 한여름밤의 정원음악회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누굴 그리워해야 하나. 온 세상이 이다지도 푸른데. 초록빛이 더욱 짙어가고 햇살이 찬란한 여름. 계절은 정원에도 찾아왔다. 봄날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려 삶의 환희를 안겨주던 LA 시민들의 휴식 공간 데스칸소 가든과 LA 카운티 식물원에도 초록이 짙다. 초록에 액센트를 주듯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풀 냄새 폐부 깊숙이 들여놓고 풀벌레들의 합창을 듣다보니 있는 그대로 더 바랄 게 없으면서도 한편으로 욕심이 생긴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하는 음악회는 어떨까. 지난 주말 데스칸소 가든의 뜰에서는 패사디나 팝스 오케스트라(Pasadena Pops Orchestra)의 콘서트가 열렸다. 부활절이면 어린이들이 보물찾기를 하던 드넓은 풀밭은 하얀 기둥을 세운 중앙의 무대와 테이블 보를 덮은 원형 탁자를 들여놓아 영화에서나 봐오던 어느 부호의 결혼식 연회 장소 같았다.


원에 들어서는 백현숙씨(39·주부)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온다. 그저 원형 극장에서 벌어지는 음악회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일단 무대 세팅이 기대 이상이다. 승혜와 승준, 준성이도 “엄마, 좋다”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음악회 시작이 7시 30분이었지만 두 시간 전부터 정원을 개방한 것은 피크닉을 즐기라는 배려.

모두들 와인에 샌드위치, 과일, 케이크와 커피까지 한 보따리씩 싸들고 와 먹고 마시며 해가 뉘엿한 초저녁 때를 만끽하고 있었다.
평소 그다지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요, 아이들만 데려 왔던 터라 와인을 가져오지 않았던 백현숙씨는 옆 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와인 향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다음 번 남편과 올 때는 화이트와 레드 색깔대로 두 병씩 가져와야지 하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오늘 프로그램은 독립 기념일을 앞두고 ‘Lady Liberty’라는 제목으로 꾸며졌다. 뮤직 디렉터이자 지휘자인 레이첼 워비(Rachael Worby)는 여자답지 않은 열정적인 몸짓으로 누에가 실 엮듯 음악을 만들어낸다.
훌륭한 지휘자이자 말솜씨도 빼어난 그녀는 연주할 음악을 만든 이와 음악에 숨겨진 에피소드를 감칠 맛 나게 설명함으로써 음악을 받아들일 감성의 밭을 고르게 해주었다.

와인을 맘껏 마신 탓에 꾸벅거리는 관객들의 모습도 여름밤의 풍경을 더욱 평화롭게 만들어준다. 음악에 취해 빠져들다 보니 시작할 때만 해도 아직 환하던 하늘에 어느새 달도 걸리고 별도 총총 밝아온다.
우리들의 감성을 촉촉이 적셔 주는 음악. 이 음악을 들으며 함께 했던 기쁨과 슬픔의 나날들이 떠오르는지, 옆 테이블의 노부부는 서로 어깨를 토닥거리며 음악회가 끝날 때까지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이렇게 가슴 따뜻한 장면을 대하며 두고 온 남편 생각이 나지 않을 리가 있나. 저녁 한 나절 떨어져 있으면서 더욱 소중함을 알게 된 그에게 백현숙씨는 오늘의 이 감동과 느낌들을 고스란히 들려줄 참이다. 그리고 다음 번엔 와인도 병으로 싸들고 꼭 같이 발걸음을 해야지, 마음을 먹는다.

화사한 꽃무늬의 나풀거리는 선드레스를 입고 왔던 여인네들이 서서히 스웨터를 꺼내 어깨에 걸치며 옆자리 남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기 시작한다.
낮의 그 뜨거웠던 대지는 서서히 식어들지만 음악으로 불지펴진 마음의 열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달아오른다. 달과 별, 꽃향기와 풀 내음,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 더 바랄 게 없는 상태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표현이 아닐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