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데스칸소는 지금 ‘꽃비 돋는 소리’

2002-03-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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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사한 봄의 미소...꽃잔치는 시작되고

계절은 도둑처럼 온다. 마운틴 발디에 흰 눈이 가득 쌓여 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세상은 꽃 천지다. 겨울날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활짝 펴고 봄나들이를 나서는 주말 아침 전경택(35·사진작가)씨와 아내 앨렌(34)씨보다 더 신이 난 건 민우(5)와 수연(3)이다.

봄기운을 가득 느끼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 마음 졸였던 건 기우였음이 곧 드러났다. 나뭇가지에 잎새도 없이 피기 시작한 자두나무의 꽃망울은 새색시의 분홍빛 한복처럼 곱게 봄나들이 나선 가족을 반겨준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마키아벨리가 선현들의 영혼을 만나러 사당에 들어갔을 때 입었을 것 같은 짙은 자색의 목련은 그 우아함과 깊이를 따를만한 꽃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게티 센터가 자랑하는 고흐의 아이리스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정원에 피어있는 아이리스만큼 예쁠 수는 없는 노릇. 4월이 오면 프로머너드를 찬란하게 장식하는 튜울립도 벌써 앉은뱅이 팬지꽃과 함께 쑥쑥 자라면서 수줍은 봉우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화가들의 팔레트보다 더욱 화사한 색깔의 꽃들은 하루가 다르게 벌어지며 정원을 물들인다.


따사로운 봄볕을 받으며 벤치에 앉아 한가로운 오전 한 때를 보내는 은발 노신사의 손에는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소설로 유명한 의사출신 영국작가 A. J. 크로닌의 책이 한 권 들려져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새소리에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꽃을 바라보다가 다시 책장으로 파묻히는 그가 넓은 정원을 온통 자신의 것인 양 향유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겨울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동백. 고창 선운사를 돌아 닿았던 동백 상림 숲은 500년 오랜 세월 동안 고향의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던 곳. LA에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데스칸소 가든의 동백 숲에는 여자들 입술 연지만큼 다양한 붉은 색의 탐스런 꽃들이 흐드러지도록 피어있다.

떨어질 때면 꽃봉오리 째 뚝뚝 떨어지는 동백. 그래서 님 향한 애절한 마음을 표현할 때 동백이 자주 인용되는 건지 모르겠다. 쥬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 머리에 동백꽃을 꽂고 다녔다던 그녀는 알프레도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동백꽃처럼 온전한 사랑을 꿈꿔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동백나무로 가득 들어선 비밀의 화원에 앉아 있으려니 정적을 깨뜨리며 꽃 비 돋는 소리가 들려온다. 동백의 꽃말은 겸손한 마음, 침착함. 선운사도 아닌 곳에 이처럼 동양적인 꽃들로 이루어진 숲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감동이다.

정원을 더욱 촉촉하게 만드는 연못에는 잉어가 유유자적하게 헤엄치며 노닐고 청둥오리 한 쌍은 다정스레 서로의 목을 부리로 쪼면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굵고 단단한 매듭지음으로 삶의 지혜를 안겨주는 대나무가 하늘 높이 뻗어있는 일본식 정원. 교각과 석등, 젠 가든 등 동양적 분위기가 가득 하다. 하얀 다기에 우려낸 우전을 마셨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낱개로 포장된 옹색한 티일지라도 아직은 조금은 쌀쌀한 아침을 따뜻하게 데워 주니 고맙기만 하다. 티 하우스는 토·일, 오전 11시-오후 3시까지 문을 연다.

데스칸소 가든에서 민우가 수연이가 더욱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미니어처 기차의 공이 크다. 장난감 크기의 기차는 역사도 번듯하게 마련돼 있고 ‘칙칙폭폭’ 하며 철길을 미끄러지듯 잘도 달린다. 신난다고 손을 흔들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만으로도 부모 된 이들의 가슴팍에는 봄꽃만큼 화사한 행복감이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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