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뛰자 뛰자꾸나, 건강을 위해!

2002-03-0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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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면 살고 서면 죽는다’ 는 한인 마라토너들의 ‘마라톤 철학’

"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

매해 3월 첫째 일요일. 아침부터 시내 곳곳을 막아놓은 바리케이드, 교통 정리에 나선 경찰들을 보고 도대체 웬 난리야 하며 볼멘 소리를 하던 것도 한두 해. 춘삼월에는 LA 마라톤이 열린다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런 난리가 이제 더 이상 짜증스레 여겨지지 않는다.

H. Jackson Brown, Jr.의 ‘생의 작은 가르침’(Life’s Little Instruction Book)이란 책에 보면 자녀들에게 주는 아버지의 사랑 어린 충고 가운데 "살면서 한 번쯤은 마라톤을 뛰어라"(Run a marathon)는 구절이 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꼭 한 번쯤 해봐야 될 여러 경험 가운데 마라톤만 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다. 세상 다른 것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마라톤만큼 이 표현이 꼭 들어맞는 게 또 있을까.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 역시 시작은 한 걸음부터였다는 사실은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숨이 헉헉 차오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10년 전만 해도 별로 찾아볼 수 없던 마라토너들의 행렬에 최근 한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늘었다. 특히 7년 전 결성된 가주 한인 마라톤 동호회(Korean American Running Team)는 매해 참가자 전원이 26.2마일 코스를 완주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올해에도 KART는 단일 팀으로는 대규모인 80여명의 회원이 출전할 예정이다.

매주 토요일 새벽 6시 여명을 가르고 KART 회원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패사디나 로즈보울 구장 주차장. 김남수(54·하드웨어 소매업)씨네는 아내 헌숙(49·주부)씨, 아들 용호(23)씨등 셋이 모두 함께 달리는 마라톤 가족이다. 온몸 구석구석을 풀어주는 스트레치로 시작하는 아침. 한 동작이라도 놓칠세라 정성껏 따라하는 김남수씨의 귀에는 온몸의 세포가 기뻐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스트레치로 풀어준 몸은 비로소 달릴 준비를 마친다. 회원들과 함께 나란히 줄을 서서 달리며 가르는 새벽 공기는 이슬 머금은 꽃들의 향기를 담아 향기롭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들과 나누는 미소 어린 인사에는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혼자서 뛴다면 로즈보울 구장 두 바퀴 길이인 14마일이 지겹고 힘들겠지만 회원들과 함께 목소리를 합해 "Yes, I Can. Yes, We Can!" 구호를 외치다 보면 말이 주문처럼 작용을 하는지 힘이 쑥쑥 나 가볍게 2시간 반 가량을 뛰게 된다.

그가 달리기를 육체와 정신의 건강 지킴이로 삼게 된 데는 남다른 계기가 있었다. 지난 6월 혈관마비로 쓰러졌다가 7시간의 대수술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퇴원한 이후 한 발짝씩 내딛으며 달리기를 시작했다. 아무리 남들이 건강 비법을 늘어놓아도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 하지만 뛰다보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음식 조절과 술 담배의 절제, 달리기의 생활화 등 생활방식이 마라토너의 것으로 전환된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비롯해 그의 건강이 극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목격한 김남수씨의 아내 헌숙씨와 아들 용호씨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지난 12월부터 달리기를 하겠다고 나섰다. 혼자 달려도 좋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뛰면서 그는 참 행복하다.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중년 배가 쏙 들어간 김헌숙씨는 요즘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에 찬 인사를 받느라 바쁘다. 이들 가족은 올해 마라톤을 완주하겠다는 투지를 다지며 오늘도 열심히 트랙을 돌고 있다.

김재복씨(69)네 역시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사돈, 손녀 모두가 마라토너인 가족.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그녀의 건강미 넘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운동과 담을 쌓은 사람일지라도 갑자기 달리고 싶어진다. 1998년부터 마라톤에 참가했던 그녀의 기록은 5시간30분 정도. 달리기를 시작하고부터 매사에 긍정적으로 사고가 전환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함께 뛰면서 깊은 대화와 격려를 나누다 보니 김재복씨 가족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화목함에 넘친다. 다른 사람을 도와줄 여력도 내 몸이 아픈 데가 없을 때 생기는 것. 날아갈 듯 몸이 가벼운 그녀는 병원 환자 돌보기 등 다양한 자원봉사로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마라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심장수술 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김남수씨, 환갑 넘은 나이의 김재복씨가 달린다.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하지 못할 것은 없음을 온 몸으로 증명해 주는 마라토너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그들의 생명력 가득한 모습이 아름답다.
KART 회원들과 함께 달리기로 주말 아침을 시작하고 싶은 이들은 박기용 회장, (323)582-7000으로 연락하면 된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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