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을은 조용하다’(The Town Is Quiet)

2002-02-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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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½

2000년 토론토 영화제서 본 수십 편의 영화중 내가 가장 감동 깊게 본 프랑스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느끼던 깊고 답답하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첫 크레딧이 나오는 장면은 카메라가 말없이 항구도시 마르세유를 따라가며 관조한다. 멀리서 떠서 보는 도시는 아름답고 조용하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그 고요란 백팔번뇌를 가리운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각자 개성이 다른 여러 인물들의 삶의 얘기가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처럼 뒤엉키면서 현대 대도시에 만연한 고뇌가 묘사된다. 살아있는 개체로서의 도시와 그 안에 사는 노동자 계급 시민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의 모자이크라고 하겠다.

가장 뚜렷한 인물은 수산시장서 생선을 자르는 막노동을 하는 30대 후반의 과묵한 미셸(아리안 아스카리드는 이 영화 감독의 아내).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심한 헤로인 중독자인 딸과 딸의 갓난아기를 돌봐야 하는 미셀은 지쳤지만 강인한 생존력을 지닌 여자다. 역시 과묵한 좌경의 바텐더 제라르(제라르 메일랑)는 헤로인 공급자이자 지하세계와 관계가 있는 정치 암살자로 미셸의 젊은 시절 연인.


부두 일을 그만 둔 폴(장-피에르 다루상)은 불법 택시운전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데 은퇴한 그의 부모는 아들의 미혼을 걱정하나 폴은 창녀들을 찾으며 태평하니 산다. 그리고 미셸은 딸의 마약 값을 대기 위해 창녀로 나서면서 폴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 남편의 위선적 좌파정치관에 신물이 난 음악선생 비비안(크리스틴 브뤼셰)과 감옥서 막 출소한 젊은 흑인 압드라만(알렉상드르 오구)이 사랑을 하게 되면서 항구도시 서민들의 인간 희극(비극)이 오버랩 된다.

많은 인물들과 그들의 문제를 질서정연하니 엮어나간 로베르 구에디귀앙 감독의 솜씨가 뛰어나다. 마르세유가 고향인 그는 고향 사람들의 절실한 문제들을 강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의 시적으로 담담하니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들의 모습과 삶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결코 어떤 해결을 모색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무기력할 정도로 비극적이지만 반드시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말 좋은 영화로 연기들이 훌륭한데 특히 아스카리드와 메일랑의 그것이 인상적이다. 성인용. New Yorker. 28일까지 뉴아트(11272 샌타모니카, 310-478-6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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