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은은한 묵향에 잡념씻은 ‘마음 밭’

2002-02-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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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람의 주말나기

바로크 시대 거장들의 터질 듯한 여인의 초상, 인상파 화가들의 햇살 머금은 정원과 바다의 풍경이 눈부시지만 때로는 화선지에 검은 먹만으로 표현한 우리 선조의 서화에서 더욱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건 강한 에스프레소의 커피 냄새가 말갛게 우려낸 차 한 잔의 풍미를 따라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게다.

정철구(58·태양 표구사 대표) 씨는 요즘 세월의 벽을 뛰어넘어 전해져 오는 선인의 기개와 인품을 서체와 그림을 통해 만나는 즐거움에 폭 빠져있다. 그저 감상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던 차에 약 두 달 전부터 일호 박태홍 선생이 이끄는 서예 교실에 등록을 하고 직접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주말 아침은 먹을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미리 갈아진 먹물을 사서 쓸 수도 있지만 벼루에 먹이 닿는 감촉과 먹의 은은한 향기를 그는 사랑한다.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오만가지 잡생각들은 먹을 가는 동안 사라져 버리고 그의 마음 밭은 비로소 붓을 휘두를 준비를 마친다.


추사 김정희는 일찍이 흉중에 오천 자가 있어야 비로소 하필(下筆) 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에 산다는 이유로 자꾸만 잊어버리던 한자들을 서예를 시작하면서 다시 공부하게 돼 기쁘다. 한 글자를 적어도 50번 이상 반복해서 쓰다 보면 글자 하나 하나의 의미는 화두가 되어 그의 가슴팍에 깊게 와 닿는다.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어야 가슴에 맑고 높으며 고아한 뜻을 세울 수 있고 예법을 쓸 수 있다던 추사 김정희의 말은 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글씨를 잘 쓰려면 무엇보다 마음 공부에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려니. 세상 그 무엇이 마음 다함 없이 될 수 있을까.

서화에 있어 용이 승천하는 것 같은 힘있는 필치도 좋지만 무엇보다 그를 사로잡는 것은 여백의 아름다움이다. 모든 것이 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상에서 조금 모자라고 아쉬운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여백의 미’는 그를 많이 사색하게 한다. 서화의 여백은 너무 많이 갖고 있는 물질들을 나눠줘야지 하는 결심, 새로운 연을 만들기보다 이미 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더 챙겨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붓을 잡기 시작하면서 그는 생업에 더욱 최선을 다하게 됐다. 하찮아 보이던 글자 하나, 낙서인지 작품인지 혼동되던 그림도 한 존재의 넋을 온전히 담고 있음을 그가 직접 글씨를 써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 수 헤아릴 수 있었을까
jy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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