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38) 감독. 장편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 한편으로 그는 스타가 됐습니다. 그의 스타성은 <쉬리>의 강제규나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친구>의 곽경택 감독과는 느낌이나 색깔이 영화의 차이 만큼이나 다릅니다. 세 감독이 뛰어난 대중작가라면, 허진호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가나 수필가쯤 될 것입니다.
섬세한 그의 문장은 결코 과장이나 수식으로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속의 작은 것들을 그는 자신의 기억으로 하나씩 펼쳐보입니다. 그 기억은 때론 역설적이기까지 합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십시오.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일상을 그는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관찰합니다.
죽음이라면 우리는 흔히 절망과 비탄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 절망과 비탄으로 살아있는 날들을 살수는 없습니다. 또 슬픔을 슬프게만 표현하면서 살 수도 없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면서, 죽음 앞에 찾아온 사랑을 안타까워 하고, 즐거워하면서 죽음을 맞이 합니다. ‘사진’은그런 기억들을 담아가는 장치이죠.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래서 더욱 서정적이고, 슬프고 , 아름다운 영화가 된 것입니다.
허진호 감독의 두번째 이야기 역시 사랑입니다. 70% 촬영을 마친 <봄날은 간다>는 지방방송국 아나운서인 이혼녀와 사운드 엔지니어인 남자의 사랑과 이별과 기억에 관한 영화입니다. 둘은 프로그램제작을 위해 소리채집을 함께 하면서 사랑을 시작합니다. 허 감독은 이 영화에서 영화적인, 우리가 흔히 꿈꾸는 그런 사랑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사랑의 상처를 갖고 있기에 사랑으로부터 자꾸만 거리를 두려는 여자와 사랑의 열정에 빠져버린 남자. 그 두 사람의 해피 엔딩이 아니라 지나간 사랑의 시간들에 대한 기억. 그 기억은 변하고 지워져 언젠가는 어느 ‘봄날’ 처럼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허 감독의 이야기는 기억하기가 아니라, 지우기 입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마지막 주차단속원인 여자가 남자가 죽은 후 그 남자와의 만남을 기억하고 다시문을 연 사진관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여자는 이따금 그 남자를 기억할 것이고, 그리고 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과 시간들이 더욱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지요.
허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감정도 느낌도 변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렸던 것들을 기억했을 때 그 감정과 느낌은 처음과 다르다. 그것이 살아가는데도 굉장히 중요하고, 그 다시 기억했을 때의 느낌이 좋다”고. 그 느낌은 때론 정반대의 정서로 우리의 마음을 울리기도 합니다.
허 감독은 가수 김광석의 영정의 맑은 미소를 보고 <8월의 크리스마스>를 생각했습니다. 외할머니 영구차가 가는 날, 길옆에 활짝 핀 개나리의 아름다움이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기억일수 있습니다.
<봄날은 간다> 역시 그의 기억이 준 것이죠. 10년전 중국음식점에서 열린 아버지의 조촐한 회갑잔치에서 어머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로서는 처음 기억되는 어머니의 노래였지요. 노랫말처럼 ‘연분홍치마’를 입은 어머니는 느리게 ‘봄날은간다’ 를 불렀습니다. 슬픔 같기도 하고 함께 한 시간을 헤아리는 것 같기도 한 그 노래를 어느날문뜩 떠올렸을 때, 그는 남녀가 함께 사랑한 시간이 문뜩 어느 ‘봄날’의 짧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그렇게 시작됐고, 소리란 ‘기억의장치’를 통해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영화란 상상의 예술이고, 현실 재연의 예술이면서 또 한 느낌의 예술이기도 합니다. 허진호 감독에게 그 느낌은 다름아닌 기억입니다. 기억은 변하고, 그 변화를 통해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느끼게 하는 그의 영화는 그래서 감성적이면서도 철학적입니다. 그의 영화가 우리 뿐만 아니라 일본과 홍콩 관객들의 가슴까지 울릴 수 있는 힘입니다. 그는 시간을 사랑하는 감독입니다.
이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