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난무하지도 않는다. 귀신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음향효과 장난으로 놀라게 만들지도 않는다. 흉기 살인은 단 한 번도 안나온다. 스토리를 비비 꼬아놓지도 않았다. 물론 객석에서건 스크린에서건 비명도 한 마디 안나온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재미있는 미스터리 심리 영화가 나왔다. 한국영화 <소름>이다.
<소름>(드림맥스, 윤종찬 감독)은 할리우드의 법칙을 깡그리 무시한 미스터리 심리영화다. 넓게 보면 공포 장르에 속하지만 공포영화의 장르 법칙을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흉기와 살인, 피, 비명 등이 난무하는 슬래셔 무비완 멀어도 한참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소름>은 상영 시간 내내 관객들을 심리적 압밥감으로 옥죈다. 보이지 않는 공포, 슬픈 색깔을 띤 공포 등이 음산하게 자리잡고 있다. 저주많은 삶들을 촘촘하게 엮은 드라마가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소름>은 슬래셔 무비를 거북해 하는 관객, 새로운 공포영화 탄생을 갈망하는 관객, 음향효과 장난보다는 짜임새있는 이야기의 공포영화를 고대하는 관객들에게 환영받을 작품이다.
남자 주인공 김명민은 택시 운전사. 그가 서울 변두리의 재개발 직전 아파트에 이사온다. 그 아파트엔 남편의 폭력에 멍든 여자 장진영, 퇴짜에 이력이 난 실패한 소설가 기주봉, 사랑하는 남자가 의문 속에 죽은 뒤 사생아를 뱃 속에 담고 다니게 된 여자 등이 살고 있다.
한결같이 변두리 인생이고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 아파트의 저주에 엮여 있다. 30년 전 빗나간 사랑이 소름돋는 비극은 낳은 뒤 이들은 한 명씩 이 아파트에 흘러들어왔다. 저주받은 운명처럼.
저주와 상처,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인 <소름>은 기존 공포영화 기준으로 보면 무섭지 않은 영화다. 그러나 살아있는 드라마와 고집스러운 연출이 제공하는 심리적 압박감은 상당하다. 중반에 계속되는 ‘1신 1컷’엔 힘이 넘친다.
그래서 흥미롭다.
<자귀모> <반칙왕> <싸이렌> 등을 거쳐 온 장진영은 마침내 여배우 기근 현상을 해갈해 줄 ‘배우’로 거듭났고, 김명민은 색깔있는 연기를 펼치며 좁은 브라운관을 뛰쳐 나왔다.
정경문 기자 moonj@dailysport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