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용 전기료 인상 폭 주택용 2배
▶ 정치권, 표의식 기업에 부담 넘겨
▶ 중소기업 조업 시간 줄여 버티기
▶ 성장발판전기지금은 산업발목
▶ 미 산업용 전기료 한국 절반 수준
▶ 중 보조금 지급 ‘싼 전기료’ 전략화
▶ 기업 경쟁력 강화·장기 투자 위해
▶ 예측 가능한 요금 체제 구축 시급
한국은 저렴한 전기를 발판 삼아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으로 도약했다. 그런데 제조업이라는 거대한 엔진에 적색 경고등이 켜졌다. 전기는 공장을 돌리는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라,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만들어온 보이지 않는 핵심 원자재였다. 그 성장의 지렛대였던 전기가 지금 오히려 산업의 발목을 잡는 부담으로 변하며, 엔진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 국면에 들어섰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산업용 전기요금은 7차례에 걸쳐 약 70% 인상되었다. 이는 제조업의 수익 구조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특히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처럼 24시간 내리 돌려야 하는 에너지 다소비 업종은 말 그대로 ‘전시 상황’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다. 용광로, 정유공장, 반도체 생산라인 등에서 나오는 제품 하나하나에 전기요금이라는 추가 비용이 덕지덕지 붙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인상의 형평성이다. 같은 기간 산업용 요금 인상 폭(67.4%)은 주택용(35.6%)의 거의 두 배에 달한다. 물가 부담과 표심을 의식해 주택용 요금 인상을 억누르는 사이, 그 비용을 기업들이 고스란히 떠안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이는 단순히 몇몇 대기업의 이윤 감소 문제가 아니라, 우리 제조업 전체의 가격 경쟁력이 서서히 침식되는 국가적 위험 신호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2022~2024년 전기 사용량 상위 30대 법인의 전기요금 총액이 9조4,725억 원에서 16조1,109억 원으로 약 70% 급증했다. 같은 기간 전기 사용량 증가폭은 13.2%에 불과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112개 기업의 평균 전기요금 납부액이 2022년 481억 원에서 2024년 657억 원으로 36.4% 증가했다. 매출 대비 전기요금 비중도 7.5%에서 10.7%로 3.2%p 상승해 원가 구조가 근본적으로 악화됐다.
대기업보다 기초 체력이 약한 중소·중견기업은 벼랑 끝으로 더 내몰리고 있다. 경기침체, 원자재 가격 상승, 인건비 부담에 더해 전기요금까지 치솟으면서, 현장에서는 “설비를 돌릴수록 적자가 난다”는 하소연이 터져 나온다. 결국 이들은 고육책으로 생산량을 줄이고, 조업 시간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버티기에 나서고 있다.
조업 단축은 숫자로 찍히는 단순한 생산 감소가 아니다. 신규 채용이 끊기고, 기존 인력을 줄여야 하는 구조조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의미다. 공장 불이 꺼지는 지역에는 상권이 함께 쇠퇴하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과 해외로 떠나게 된다. 전기요금이 결국 지역 공동체의 미래와 청년 세대의 삶의 궤적을 바꾸는 보이지 않는 ‘고용세’로 작동하는 셈이다.
문제는 전기요금을 마냥 내리기도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탄소중립이라는 ‘환경적 부채’를 청산하려면 역설적으로 더 많은 전기 소비와 에너지 투자를 해야 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산업의 전기화(공장 보일러, 가열로, 운송수단을 전기 기반으로 바꾸는 흐름)가 가속화될수록 우리 전력망이 감당해야 할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한국 철강업계와 석유화학업계가 각각 추진 중인 수소환원제철과 전기가열로 전환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들 모두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대표적 시도이지만, 기존 공정보다 최소 2배의 전기를 더 먹는다. 기업이 친환경 설비를 도입해도, 정작 그 설비를 돌릴 전기가 비싸고 불안정하다면 투자의 동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합리적인 전기요금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는 탄소중립은 구호에 그치고, 기업에는 “친환경 하라면서 한국을 떠나라는 것이냐”는 냉소만 남길 위험이 있다.
글로벌 경쟁의 판도는 이미 재편되고 있다. 미국은 셰일 혁명으로 확보한 값싼 가스와 재생에너지 확대를 바탕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을 크게 낮췄다. 2025년 기준 미국 텍사스주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h당 평균 94원으로, 우리의 절반 수준이다. 이런 가격 차이는 전기 다소비 산업의 입지 결정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포스코, 현대제철, 고려아연 등이 미국에 공장을 짓기로 하는 등 세계 각국의 공장이 미국으로 ‘오프쇼어링(offshoring)’ 흐름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은 풍부한 석탄 자원과 세계 최대 규모의 재생에너지 설비를 동시에 활용하면서, 국가 차원의 보조금을 곁들여 전략적으로 낮은 전기요금을 제공하고 있다. 이 싼 전기를 무기 삼아 데이터센터와 배터리, 전기차 공급망을 자국으로 흡수하며 제조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중이다. 미·중이 전기를 ‘산업 병기’로 삼아 글로벌 생산기지를 빨아들이는 동안, 에너지 자원이 거의 없는 한국은 ‘전기요금 샌드위치’에 갇힐 위험에 놓여 있다.
지금의 전기요금 위기는 단순히 국제 연료가격 탓으로만 돌리기 어렵다. 자동차가 고장 난 원인을 ‘도로 상태’만 탓하듯, 에너지 시장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요금 결정 방식과 정치적 고려가 쌓여 만든 ‘누적 고장’ 결과이기 때문이다. 2021년 도입된 연료비 연동제는 국제 연료가격 변동을 요금에 자동 반영해 합리적 소비를 유도하자는 취지로 출발했으나, 정치권이 물가와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사실상 ‘장식품’처럼 무력화됐다.
그사이 한전의 재무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부채가 206조 원에 달하고, 하루 이자만 119억 원을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막대한 이자 비용은 원래 노후 설비 교체, 재생에너지와 송전망 투자, 효율화, 혁신형 에너지기업 육성 등 미래 먹거리 재원으로 쓰여야 할 돈이다. 결국 왜곡된 요금 정책의 비용을 미래 세대가 뒤늦게 떠안게 되는 구조로, 정치가 ‘산업의 심장’을 약화시킨 셈이다.
기업을 위해 무조건 전기료를 낮추자는 것이 아니다.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마냥 싼 전기가 좋은 것도 아니다. 설비투자와 고용, 연구개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만큼 예측 가능한 전기요금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올 연말에 얼마가 될지, 내년 여름 피크 타임에 어떻게 변동될지 알 수 없는 요금 구조에서는 10년짜리 투자 계획도, 탄소중립 로드맵도 책상 위 설계도에 그치기 쉽다. 기업 경영진이 “전기요금이 불확실하니 해외로 공장을 이전할까” 고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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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