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당뇨병·비만 등 질병 있으면 비자 거부”

2025-11-10 (월) 12:00:00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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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행정부 새 지침
▶ 전 세계 영사관에 하달

▶ ‘건강조건’ 강화해 논란
▶ “위험한 발상”우려 커져

“당뇨병·비만 등 질병 있으면 비자 거부”

서울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 미국 비자를 발급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연합]

트럼프 행정부가 비만이나 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이유로 이민자의 비자를 제한할 수 있는 새 지침을 도입해 논란이 일고 있다. 국무부가 최근 전 세계 미국 대사관과 영사관에 하달한 이 지침은 신청자의 건강 상태를 비자 발급 여부의 핵심 요소로 평가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실질적으로 취약계층과 장애인을 겨냥한 차별적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난 6일 비영리 보건전문 매체인 KFF 헬스뉴스에 따르면, 국무부는 영사관 직원들에게 신청자의 연령, 질병 이력, 재정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미국 입국 시 ‘공적부조(Public Charge)’, 즉, 정부 재정에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새 지침은 “심혈관 질환, 호흡기 질환, 암, 당뇨병, 대사성 질환, 신경계 질환, 정신건강 문제 등 장기적이고 고비용의 치료가 필요한 질병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에 비만과 고혈압까지 포함돼 있어 사실상 의료 사유로 입국을 제한할 수 있는 폭이 크게 넓어졌다.

이전까지 이민비자 신청자는 미국 대사관이 지정한 의사의 건강검진을 통해 결핵 등 전염병 여부, 예방접종 이력, 약물·알코올 사용 여부, 정신건강 기록 등을 제출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지침은 비전염성 만성질환까지 포함하면서 비자 심사권한을 비의료 전문가인 영사관 직원에게 부여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가톨릭 이민법지원네트워크(CLINC)의 찰스 휠러 선임 자문관은 “영사관 직원들은 의료 전문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판단에 따라 미래의 의료비용이나 긴급상황 발생 가능성을 추정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며 “이는 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조치가 “사실상 영주 이민자나 가족 동반 이민 신청자에게 집중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실제 국무부 공문에는 “신청자가 평생 치료비를 공공보조나 정부 재정 지원 없이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자산이 있는가”를 묻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이에 따라 비자 심사관은 신청자의 건강 상태뿐 아니라 취업 가능성, 재정 자산, 그리고 부양가족의 건강 상태까지 검토해야 한다. 가족 중 만성질환자나 장애인이 있을 경우, 신청자의 근로 지속 능력까지 문제 삼을 수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지침이 트럼프 행정부가 2019년에 추진했다가 법원에서 제동이 걸린 ‘공적부조 규정’의 부활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규정은 복지 수혜 가능성이 있는 저소득층 이민자에게 영주권이나 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내용으로, 인권단체와 이민 변호사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노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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