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지형 싸움이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선거구 재조정은 보통 10년 주기로 인구조사 뒤에야 바뀌지만, 이번엔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텍사스 주에서 당파적 중간 선거구 재조정을 밀어붙이자 캘리포니아도 맞불을 놨다. 캘리포니아 주 의회는 지난 21일 연방 하원 선거구 재조정을 주민투표에 부치는 안을 통과시켰고 주지사가 이날 즉각 서명했다.
독립적 선거구 재조정 모델을 자랑해 온 주에서 이런 선택이 나온 것 자체가 이미 큰 뉴스다. 문제는 “원칙을 지킬 것인가, 실리를 택할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이번에는 절박한 의석 수라는 냉정한 계산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찬성 쪽 논리는 간단하다. 그동안 지켜온 중요한 규칙을 상대가 먼저 어겼고, 이대로 손 놓고 있는다면 전쟁에서의 패배는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연방 하원 다수당 싸움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캘리포니아가 스스로의 규범을 잠깐 접어두고라도 균형추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대론도 만만치 않다. 보복을 위해 공정성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버린다는 식의 비판이다. 또 독립적 선거구 재조정 모델은 캘리포니아가 어렵게 쌓은 민주주의 실험의 성과인데, 이번과 같은 선례를 남기면 향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보복 지도’가 일상이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찬성과 반대, 어느 쪽이든 유권자에게 요구되는 건 계산법의 선택으로 보인다. 다만 이미 주지사의 서명까지 속전속결로 끝났고, 여론도 찬성이 크게 우세한 상황으로 나타나는 만큼 현재로써는 주민 찬반투표에서 찬성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텍사스는 최근 공화당 주도로 추가로 약 5석을 노리는 지도를, 반대로 캘리포니아는 민주당이 최대 5석을 추가 확보할 수 있는 지도를 내놓으며, 텍사스 효과를 상쇄할 수 있도록 대응했다.
LA와 오렌지카운티 경계를 지나며 한인들도 많이 거주하는 45지구는 지난번 선거에서 수백표차 접전 끝에 민주당이 차지했는데 새 지도에서는 민주당 우세 지역으로 재편되며 방어가 매우 쉬워질 수 있다. 이 곳은 한인 미셸 박 스틸 전 의원이 관할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현재 한인 데이브 민 의원이 관할하는 47지구도 마찬가지다.
또 한인 영 김 의원이 관할하는 40지구는 공화당이 이미 유리했던 지역이었지만, 성향이 더 강해진 보수 텃밭으로 변모할 예정이라 언뜻 좋아 보이지만, 변수는 옆의 동료 공화당 의원 지역구가 민주당 강세 지역으로 변하는 점이다. 오히려 40지구에서 공화당 후보들 끼리의 싸움이 격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변화들을 유심히 관찰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한인 의원의 재선 여부 때문만이 아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인사회가 실용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캘리포니아가 추진하는 ‘맞불 조정’은 단순한 당파 정치의 계산을 넘어, 소수민족 커뮤니티가 어떤 환경에서 목소리를 내야 할지를 결정짓는 중대한 분수령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원칙을 잠시 접어두면서까지 정치 지형을 바꾸려는 시도가 우리 같은 ‘스윙 보터’ 커뮤니티에 어떤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내는 지를 분석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경계가 달라지면 관할 의원이 바뀌고, 정책 우선순위가 달라지고, 행정 서비스의 질도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결과만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의석 수 계산에 매달리는 대신, 변화하는 지도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목소리를 키워낼 것인가이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되, 결과에 휘둘리지 않고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가 필요하다. 또한 유연한 대처와 공통 의제의 강력한 추진 등을 위해 타 아시안 혹은 그 외 다른 인종의 커뮤니티와 연대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지도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지도 위에서 우리의 영향력이 커질지 줄어들지는 준비된 대처 방식에 달려있다.
<
한형석 사회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