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요 에세이] 봄씨의 선물

2025-05-14 (수) 12:00:00 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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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사람처럼 ‘봄씨’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내 딴에는 썩 괜찮은 호칭인 것 같다.

꽃씨를 얻었다. 지난해 12월, 시를 쓰는 정 선생님이 준 선물이다. 투명 봉지에 담긴 도라지, 한련화, 팬지, 금송화 씨앗들. 시인의 꽃밭에서 손수 씨를 받은 거라 했다. 흙으로 꽉 채워진 커다란 네모 플라스틱 상자도 왔다. 보기엔 흙만 가득한 그 상자 안에 도라지꽃 씨앗이 잠자고 있었다. 여름에 주려다가 시기를 놓쳐 겨울이 되어서야 받게 되었으니 이미 한 번 피었다 진 새순이 흔적 없이 묻혀있는 셈이다. 새봄에 다시 피어날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올해 1월 퍼시픽 팰리세이즈 산불이 났고 산 너머에 있는 우리 동네도 경고를 받았다. 전기가 끊겼고 소방 헬리콥터가 쉴 새 없이 가쁜 숨을 내뿜으며 오고 갔다. 휴대폰은 사용할 수 있어서 동네 이웃들과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 실시간 뉴스를 공유했다. 다행히 나흘 만에 전기는 복구되었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중요한 짐을 차에 실어두라는 의견이 많았다.


가방에 무엇을 집어넣어야 한단 말인가. 마당에서 수십 년 살아온 나무들, 코로나를 같이 헤쳐온 작은 화분들은 어떡하나. 새로 온 도라지꽃 모판은 어쩌나. 내 앞에 있는 것들이 내 것이 맞는데 아무것도 내 것인 게 없다는,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물을 줘야지, 할 일을 해야지. 마침내 다행히 우리 동네 사람들은 집을 떠나는 일 없이 불안과 긴장의 시간을 마감했다.

달이 바뀌고 바뀌어 일상을 되찾고 새봄을 맞았다. 네모 상자 속 흙은 도라지 싹을 밀어 올렸다. 잿가루와 연기 냄새를 함께 겪은 동지애랄까. 아기 손을 잡고 안도하는 엄마의 마음이랄까. 코끝이 시큰거렸다. 열두 개의 도라지 새순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키가 자라고 잎을 넓힌다. 머잖아 모판을 떠나 땅에 안착하게 될 것이다. 보라색 꽃이 필지 흰 꽃이 필지 모르겠으나 건강하게 자라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매일 들여다본다. 혹여 따가운 햇빛에 시들까 싶어 부엌 큰 창문 앞 처마 아래 놓아두었는데 오늘 보니 햇빛을 향해 일제히 쏠려 있는 게 아닌가. 그늘을 벗어나려는 무언의 시위처럼 보였다. 살자고 이러는구나. 얼른 자리를 옮겨 주다가 나도 모르게 큭, 웃음이 나왔다. 참 웃을 일 없는 요즘 같은 때 연초록 웃음이 터진다. 새벽녘에 읽은 정연철 시인의 동시 ‘평등’이 퍼뜩 떠올라 또 웃었다.

검은 콩/ 누런 콩/ 하얀 콩// 눈뜰 땐/ 모두/ 연노란 새싹//

그렇지. 색색깔 꽃도 처음에는 다 연두로 태어났지. 이파리들 속 엽록소가 가시광선 중 초록색을 흡수하지 않고 반사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초록은 자연의 선물이다. 공짜 선물.

뒷마당엔 작은 잡초랑 들풀이 햇살 아래 초록으로 환하다. 잔디를 걷어낸 후로 포장하지 않고 흙 그대로 두었더니 전입신고도 없이 밀고 들어온다. 주인인들 맘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몇 평 안 되는 마당의 주인 노릇 간단치 않다고 푸념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꽃씨를 뿌려야겠다. 봄씨가 떠나기 전에.

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달 5월이 깊어간다.

<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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