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보호무역 상징’ 리드 스무트와 윌리스 홀리

2025-05-14 (수) 12:00:00 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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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무역주의를 상징하는 법으로 남은 ‘스무트-홀리 관세법(1930년 관세법)’은 법안을 대표 발의한 두 의원의 이름을 땄다. 리드 스무트 상원의원은 유타주 출신으로, 법안 발의 당시 상원 재정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그는 당시 하원 세입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오리건주 출신 윌리스 홀리 의원과 함께 관세법 제정에 앞장섰다.

당시 상황은 미국이 과잉 생산에 시름할 때였다. 보호무역주의자였던 스무트 의원은 이전부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법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자들이 수입품 대신 국내 생산품만 쓰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유타주의 설탕과 양모 산업이 쇠퇴하는 것이 값싼 수입품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수출로 이득을 얻고 있던 다른 쪽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과잉 생산된 공산품을 해외에 팔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 피터 로디 유타대 교수는 “스무트는 관세 전문가였지만, 당시 경제가 얼마나 세계화된 상태였는지를 알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상대국 보복조치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참패의 원인이었다.


1929년 봄 발의된 법안이 1930년 6월 대통령 서명을 받을 때까지 수많은 경고등이 켜졌지만 두 의원과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이를 무시했다. 이미 이 법안에 들인 정치적 자본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결과는 익히 알려진 대로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이후로도 두 사람 모두 이 법의 맹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스무트 의원은 “관세 장벽은 (필연적인) 결과이지, 대공황의 원인이 아니다”라며 “시간이 지나면 이 법의 지혜로움이 이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의원은 모두 바로 1932년 열린 다음 선거에서 짐을 싸야 했다. 유권자들이 스무트-홀리법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미국은 1932년 선거에서 전 정부의 잘못된 관세 판단을 집중적으로 비난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새로운 리더로 뽑았고, 뉴딜 정책과 2차 세계대전을 발판 삼아 대공황의 늪을 비로소 빠져나갈 수 있었다.

<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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