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언젠가는

2025-04-24 (목) 12:00:00 박연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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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여행은 계절에 상관없이 갈 수 있지만 아무래도 따뜻한 날씨가 제격이다. 누가 날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몸이 들썩인다. 지중해 크루즈, 캐나다 로키, 알래스카, 산티아고 순례길, 모국관광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이 컬러 사진으로 신문 양면에 가득하다. 색색의 과일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풍성하여 고르는 일이 쉽지 않지만 즐거운 고민이다.

가고 싶은 곳, 언젠가는 가야 할 곳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설사 지금 떠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어느 계절에 가면 좋은지, 누구와 같이 가고 싶은지, 무엇을 볼 수 있을지 상상하는 그것만으로도 여행을 반쯤 다녀온 기분이다.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곳들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한다. 우선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여 경험을 쌓으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번 간 곳이지만 그랜드 캐년과 브라이스 캐년을 다녀올 예정이다. 갈 때마다 일부분만 보고 지나온 터라 몇 번을 가도 좋은 곳이다.


여행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언젠가는’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젊은 날에는 돈이 없었고 바쁘기도 했다. 꼭 가려고 작정했다면 갈 수는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조금만 시간을 내면 되는 곳도 미련 없이 포기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그때는 가까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먼 나라가 되어 버려 다시 가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정기검진을 다녀온 후 내일 죽음이 달려오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 미룰 수 없어 정리를 시작했다. 묵은 먼지를 털어 청소하고, 옷장을 정리하고, 한동안 쓰지 않던 물건을 나누었다. 쌓아놓은 그릇이나 가방은 많지 않아 다행이다. 운동은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언젠가 입을 것 같아 모아놓은 여러 벌의 운동복 중에서 필요한 것만 남기고 정리했다. 애정을 쏟던 화분도 더 늘리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는’이 멀리 있는 막연한 미래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내 생에 남은 해를 세어보다가 인생이란 내일 일도 알 수 없다는 단순한 명제에 조금은 슬픈 깨달음이 왔다. 하루아침에 생활을 다 바꿀 수는 없겠지만 한가지씩이라도 언젠가 하고 싶었던 일, 좋아하는 일을 지금 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생각만 하고 하지 않았던 하찮고 소소한 일이라도 해봐야겠다. 남의 평판이 두려워 주저하던 일도 일단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겠다. 꼭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침대칸 기차 타고 대륙 횡단하기, 고흐의 그림 ‘밤의 테라스’ 노란 지붕 아래서 커피 한잔 마시기, 사계절 끊임없이 꽃 피는 정원 가꾸기, 식기 세척기가 두 개인 부엌 갖기, 창밖에 내리는 눈 바라보며 군고구마 먹기, 노래 한 곡 열심히 연습해서 멋지게 부르기, 요트 타고 세계를 돌며 바다에 살고 싶다던 친구 만나러 가보기, 프라하성 올라가기. ‘언젠가는’을 앞당긴다고 마음먹으니 즐거운 일상이 덤으로 온다.

언젠가는 봄이 올 거야, 언젠가는 지나갈 거야.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은 무엇으로도 확장되는 위로와 희망의 언어이다. 하지만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는다. 삶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나중에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들을, 절절히 원했던 것을, 지금 해도 좋다. 우리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 기다릴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나는 길 떠날 채비가 되었다.

<박연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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