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뉴스에서 한국의 영유아의 영어 조기교육에 대한 한국 부모들의 여러 의견들이 나왔다.
어린이의 영어 개인교수비가 대학 학비와 맞먹으며, 그래서 조기고시라 부른다고 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조기교육을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게 된다. 조기교육은 우리나라 엄마들의 특별한 교육열에서만 시작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올라가보면 16세기 프랑스의 미셸 드 몽테뉴의 조기교육이 떠오른다.
60년대 나는 남편을 따라서 외국생활을 시작했는데 한글과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읽을 책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그때 남편이 한국에 주문해서 부쳐온 책, 1965년 손우성씨가 번역한 <몽테뉴 수상록>3권을 위편삼절(韋編三絶)이 되도록 애독했었다.
몽테뉴의 아버지는 이태리와 전쟁에서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갓 태어난 아들, 몽테뉴의 조기교육을 위해서 아기가 잠들 때와 깨어날 때 음악을 들으며 깨게 했으며 그 어렵다는 라틴어를 쉽게 배우게 하려고 라틴어를 말하는 보모를 두었다. 가족들도 몽태뉴 앞에서는 프랑스어 대신 라틴어만 말하게 했다. 그래서 몽태뉴가 자라서 쉽게 법학을 공부하고 훌륭한 변호사가 되었으며, 나중엔 보르도오시의 시장이 될 수 있었다.
16세기 흑사병은 유럽인구의 1/3을 휩쓸어 갔다. 1585년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보르도오시도 강타했다. 어느 날 몽테뉴는 시의회에 참석하기위해 집(몽태뉴성)에서 보르도오시로 마차를 타고 가는 도중, 페스트를 피해서 피난 가는 수많은 시민들과 만났다. 그는 보르도오시에 번진 페스트 소식을 듣고, 바로 마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서는 가족들을 챙겨 안전한 곳으로 피난 갔다. 몇 개월 후 보르도오 시에 전염병이 수그러들자 그가 돌아왔는데, 그는 시민들로부터 시의 책임자로서 비상시에 임무를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고 시장직을 사직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집에서 독서생활로 접어들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에선 시와 소설만이 문학으로 전해 내려왔으며 수필은 사적인 글로 전달 사항 이외엔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는 체험문학의 출현을 보게 되는 시기여서 몽테뉴가 자신의 글을 쓰게 된 풍토였다.
“시칠리아의 왕 르네가 붓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듯이, 나는 펜으로 나 자신을 그린다.”며 자신과 사회 전반에 관한 그의 지적인 판단과 철학적 사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내 자신이 바로 내 책자의 재료”라고 말했다. 그것은 현대 수필문학의 본질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 그의 수상록은 르네상스시대 문학적 총결산이며, 에세이 장르의 원조로서 유럽에 고대 회의주의 사상을 부활시켰다. 몽테뉴 아버지의 조기 교육은 성공적으로 그를 역사적 인물로 만든 것이다. 조기교육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과 교육적 의미를 주는가는 일률적이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누구나 조기교육의 기회는 주고 싶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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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