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팰리세이즈 주택 전소 한인 가족의 눈물
▶ “같은 골목 22채중 3채만 남고 전소 피해 복용약도 못 챙겨… 실감 안나 울음만”
▶ 거주자도 출입통제에 확인 못하고‘분통’
(왼쪽 사진) 화마에 불타버린 주택들이 폐허처럼 남은 퍼시픽 팰리세이즈. (가운데) 12일 이 지역 진입로는 주 방위군과 CHP가 배치돼 거주민들까지 모든 출입을 통제했다. (오른쪽) 이날 불타 버린 집을 확인하려던 한인 제이슨 고씨가 당국의 출입 통제에 막혀 들어가지 못하자 비통함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박상혁 기자]
역사적인 대재앙으로 기록될 LA 지역 산불이 일주일째 이어지며 피해 규모가 확산되고 있다. 최악의 기상 조건과 소방 자원 부족 등으로 진화 작업이 더딘 가운데, 한인들의 피해 소식까지 잇따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팰리세이즈 산불’로 인해 37년 동안 살아온 집이 전소된 피해를 입은 한인 바니 고(75)씨는 본보와 가진 인터뷰에서“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했던 터전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곳에 쌓인 추억들과 손때 묻은 시간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너무 마음 아프고, 앞으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깊은 상실감을 토로했다.
지난 7일 퍼시픽 팰리세이즈와 토팽가 캐년 사이에 위치한 선셋 메사 지역의 바니 고씨 집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평온한 아침을 맞이했다. 골프 약속이 있던 고씨와 출근하는 며느리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고,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과 출근 시간이 늦은 아들은 집에 남아 있었다. 산불 발생을 감지한 것은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고씨의 어린 손자를 데리고 수영 레슨을 갔던 보모가 허겁지겁 집으로 다시 돌아와 산에서 연기가 보인다고 전했다. 고씨는 “산불이 자주 나는 지역에 살아서 중요한 문서들을 모아 놓는 등 늘 대피를 대비하고 있었다”며 “운동 중 가족들의 전화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정도로 빠르게 불이 번져 내 집이 전소되는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고씨의 남편은 모아 놓은 문서들과 어린 손자의 생필품을 챙기고, 고씨의 아들 제이슨 고씨는 지붕으로 올라가 집과 주변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나 연기가 짙어지자 남편과 손자는 먼저 대피에 나섰다. 샌타모니카 쪽 도로는 이미 통제돼 말리부 쪽 길만 뚫려 있었고, 도로는 피난 나온 차량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이슨씨는 집에 남아 프로판 가스통과 땔감 나무 등 가연성 물질을 찾아 정리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호스를 연결해 집 주변 뿐만 아니라 이웃집에도 쉴 새 없이 물을 뿌렸다. 오후 2시가 넘어 경찰들이 돌아다니며 당장 대피하라고 경고할 때까지 제이슨씨는 집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했다.
그 무렵 고씨는 샌타모니카 쪽으로 돌아 남편과 손자가 있는 말리부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금방 도착할 거리가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말리부에서 가족을 만난 후 다시 밸리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말리부 캐년에서 산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며 도로가 아수라장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우들랜드힐스에서 모두 모인 가족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고씨 가족은 대피 중에도 자신들의 집이 잿더미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들 제이슨씨는 “산 속에 있는 집도 아니고 도로가 넓은 지역이라 불이 붙는다 해도 진압될 줄 알았다”며 “하지만 오후 2시가 넘어서 내가 내려오기 전까지 단 1대의 소방차도 동네로 들어오지 않았다. 삽시간에 퍼진 불길에 손쓸 틈도 없이 불타버렸다”고 말했다.
고씨의 이웃들이 보내준 사진과 동영상에 따르면 고씨가 살던 골목의 주택 22채 중 형태를 유지한 집은 단 3채에 불과했고, 나머지 19채는 모두 전소된 상태다. 12일 제이슨씨가 직접 집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나섰으나 해당 지역은 외부인 뿐만 아니라 거주민까지 출입이 금지된 상황이었다. 제이슨씨는 “대피 후 집 상태를 확인하려는 주민들까지 통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경찰과 주 방위군까지 투입됐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저수지엔 물이 하나도 없고, 소화전마저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이 과연 선진국에서 벌어질 일인가”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현재 고씨 가족은 플라야 비스타에 있는 지인의 콘도에서 머물고 있다. 바니 고씨는 “서류들과 어린 손자의 생필품 외에는 귀중품은커녕 매일 먹어야 하는 복용약도 챙겨 나오지 못했다”며 “감사하게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고씨는 “오랜 세월 그곳에서 살았고, 거기서 겪은 모든 일이 내 삶의 일부였는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공허하고 허탈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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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