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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흑백 요리사

2024-12-27 (금) 12:40:56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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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배추전이 먹고싶을 때가 있다. 경상도에는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올라가는 배추찌짐을 말하는데 배추잎과 소금만으로 구워진 배추전은 아삭하고 시원한 맛이 그만이다.

이 배추전과 안동국시를 먹으러 경동시장 지하 안동국시 식당에 가자고 하여 얼떨결에 따라갔다. 이 식당 주인이 흑백요리사 프로에 나와 요즘 인기라고 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니 좀 어둡고 어수선한데 홍어 삭힌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 안동국시 안쪽의 홀과 가판 식당이 있고 40여 명이 서있는 줄 끝에 우리 일행도 섰다. ㄷ자 가판식당 오픈 주방에서는 7~8명이 정신없이 전을 부치고 국수를 삶아내는데 노인부부가, 연인들이, 유모차 끈 부부가, 손님들이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지난 9~10월 방영되었던 넷플릭스 요리경연프로그램 ‘흑백요리사:요리계급 전쟁’에 이 식당 아주머니가 ‘이모카세 1호’ 닉네임으로 나왔고 100명 출전요리사 중 탑 6에 들었다고 했다.

그때는 이 프로를 한 번도 보지못했었는데 한쪽만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바로 그 옆 소머리국밥과 돼지국밥 식당은 커다란 가마솥 두 개에 새하얀 김이 솟아오르며 국이 설설 끓고 있는데 손님이 두 명뿐이었다.

건너편 보리 비빔, 돌솥 비빔, 그 옆의 동태찌개, 순대국 집도 손님이 대여섯 명, 제대로 손님을 맞는 식당이 드물었고 40분 기다리는 동안 국밥집 주인 얼굴 보기가 미안했다. 그만 가자고 말할 위치는 아니어서 결국 얼갈이 배추 몇 점이 들어간 안동국시와 배추전을 먹긴 했다.

이 식당은 평소 두 배 이상인 하루 국수 1,000그릇을 팔고 하루 매출이 약 800만원, 월수익이 1억5,000만원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잠시도 쉬지못하고 일하느라 허리를 콩콩 두드리는 분은 지쳐 보였다.

유명 TV 프로에 나왔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식당간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도 되는 건가, 다른 옆의 식당주는 얼마나 부러울까 싶었다.

흑백요리사에 출연했던 셰프들은, 심지어 경연에서 탈락한 셰프가 하는 식당들은 매출이 엄청 늘어났다고 하는데 이것이 전체 요식업계의 활황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프로를 보았다. 12회를 다 보기에는 시간이 없어 1회~3회, 10회~12회까지 보았는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시즌 2도 확정되어 내년 하반기에 공개된다고 한다.


이탈리아 유학파, 백악관 만찬 스타 셰프, 급식대가, 동네맛집, 유명요리 유튜브 등을 흑과 백이라는 계급대결로 나눠 요리 경연을 펼쳤고 이에 맛깔스러운 심사평이 재미있었다.

이 프로가 대성공을 거두자 다른 방송에서도 다양한 기획으로 만든 요리예능 프로그램이 계속 나오고 있다. 5년 전 유명인의 냉장고 안에 든 식품으로 셰프 2명이 짧은 시간 안에 요리대결을 하던 ‘냉장고를 부탁해’가 다시 나왔으니, 그야말로 대한민국이 다시 먹방 시대로 돌아온 것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유명셰프 식당에 갈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출연 요리사들의 식당은 예약하려면 보통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며 한 끼에 보통 수십 만원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요즘 가정경제가 어려워 직장인들은 점심으로 편의점에서 줄김밥이나 삼각김밥, 라면으로 해결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식욕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맛있는 음식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우리 조상들도 다섯가지 복 중에 식복(食福), 즉 먹는 복을 으뜸으로 여겼다.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시절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싸움도 하고 전쟁도 치렀다. 군량이 떨어지면 싸울 힘도 의욕도 떨어져 싸움에서 졌다. 전쟁에선 군량미 확보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이 식당은 배추전 8,000원 안동국시 8,000원, 수육 12,000원, 배추잎에 조밥과 된장을 쌈사먹는 소박한 식단이다. 일반인들이 ‘나도 그 유명한 흑백요리사 식당에 가보았다’는 일종의 만족감, 맛 좋고 부담 없는 가격에 이렇게 손님들이 모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수많은 요리 프로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보는 것은 흥미롭지만 파인 다이닝(고급레스토랑)과 일반식당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켜 위화감을 조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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