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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 주춧돌 놓은 아펜젤러…고향서는 잊힌 존재였다

2024-11-0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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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여년 만에 고향서 부활…한국 교인들 다녀가고 묘비도 세워줘

▶ “언더우드는 한국이 세계 교회 중심이 될 것으로 믿어”
▶ 초기 선교사들의 열정을 찾아서…미국 동부지역 탐방기

조선과 미국이 조약을 체결한 1882년 이래로 포교를 목적으로 한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찾았다. 1885년 4월 5일 한배를 타고 제물포에 동시에 내린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와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1858∼1902)는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교계 중 상당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한 4월 5일을 한국 기독교 창립일로 보고 있다. 다만 이들보다 몇 달 앞선 1884년 9월에 입국한 선교사이자 의사·외교관인 호러스 앨런(1858~1932)까지도 창립 멤버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따라 교계는 올해부터 내년까지를 한국 기독교 창립 140주년으로 폭넓게 규정하고, 이달부터 약 1년간 140주년 행사를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다.

그 첫 행사로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추적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국내 취재진과 새에덴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이 자라고 공부했던 미국 동부지역을 탐방해 그들이 공부한 흔적, 한국으로 떠난 이유와 사명(使命), 현지인들이 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 선교 주춧돌 놓은 아펜젤러…고향서는 잊힌 존재였다

아펜젤러가 다닌 교회(신축) [새에덴교회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 100여년 만에 고향에서 부활한 아펜젤러


아펜젤러의 고향은 펜실베이니아주 수더튼이다. 임마누엘 레이디스교회는 그가 태어난 1858년에 건축됐다. 원래 건물은 중축됐으나 현재는 예배 목적으로 사용되진 않는다. 약 10년 전 신축 교회가 인근에 건립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펜젤러는 유명하지만, 고향 땅에서 그의 존재는 100여년 간 잊힌 존재였다. 임마누엘 레이디스교회에서 36년간 사목했던 존 니더하우스 전 담임목사는 그의 존재 자체를 오랫동안 몰랐다고 했다.

"담임목사를 시작한 지 15년 정도가 지나면서 로스앤젤레스(LA) 쪽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아펜젤러의 고향이 여기 아니냐'는 문의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아펜젤러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죠."

목사도 모르는데, 고향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니더하우스 목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마을 사람들도 조금씩 그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는 설교 때 아펜젤러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고, 그에 관한 브로슈어도 제작해 교회에 비치했다.

여기에 한국인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것도 아펜젤러를 알리는 데 한몫했다. 니더하우스 목사에 따르면 한국 교인들은 마치 성지순례지처럼 아펜젤러의 고향을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니더하우스 목사는 "교회의 재정 상태가 안정적이어서 돈이 필요 없는 상황이지만 한국인 교인과 관광객들이 교회를 찾아 많이 기부하고 간다"고 귀띔했다. 이 교회는 10여년 전 80명 안팎의 신도가 전부였으나 현재는 300~350명 수준으로 늘면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아펜젤러의 이름이 고향 땅에서 조금씩 알려지고, 한국 교인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의 묘역도 생겼다. 충청도의 한 교회에서 5천달러를 기부해 묘비를 만든 것이다. 다만, 실제 유해(遺骸)는 이곳에 없다. 아펜젤러는 1902년 서해에서 선박 사고로 숨졌는데, 당시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 '개천용' 언더우드…"세계 교회의 중심은 조선이 될 것"

아펜젤러와 같은 날 한국에 도착해 사목활동을 이어간 언더우드는 유서 깊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진홍 뉴브런즈윅신학교 석좌교수에 따르면 언더우드의 외증조부는 세계기독교회장을 지냈다. 조상들이 그러했듯, 그도 목사가 돼 선교에 나서는 걸 꿈꿨다. 목사가 되려면 공부해야 했지만, 그만한 돈이 집안에 없었다. 형제들이 돈을 벌어 언더우드의 학비를 마련했다. 가족의 지원을 받은 그는 뉴욕대를 졸업하고서 뉴저지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한 후 마침내 목회자가 됐다. 그는 가족 내에서 유일한 대학 졸업자였다.

뉴저지에 있는 그로브 개혁교회는 그런 언더우드가 어린 시절 12년간 다녔던 교회다. 설립된 지 181년이 된 이 교회에는 이민자들이 많았다. 언더우드 가족도 그랬다. 그들은 영국 출신으로 뉴저지에 정착했다.

그로브 개혁교회의 스티븐 게르모소 목사는 "이 교회는 이민자 동네에 세워졌다"며 "신도들은 언더우드가 다닌 교회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팬데믹 이래로 교인이 줄어 현재는 40~50명 정도 된다"며 "이처럼 작은 교회지만 언더우드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역주민에 대한 봉사와 원조 활동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언더우드가 다닌 교회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뉴저지 뉴브런즈윅신학교가 있다. 언더우드가 다닌 학교로, 현재 언더우드 컬렉션을 보관 중이다. 언더우드가 형 토마스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해 그와 관련한 책 등 각종 자료를 모았다. 그가 보낸 편지 등을 보면 언더우드는 조선에서 사목하며 기대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진홍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언더우드는 일본은 호전적이고, 중국은 지나치게 상업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언젠가 조선이 '크리스천 코리아'로 일어나 세계 기독교의 중심 국가가 될 것으로 낙관했다.

특히 그는 문화와 종교의 교류는 쌍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언더우드는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는 한국어 문법서와 한영사전을 1890년에 편찬하기도 했다.

언더우드는 '전도하려는 나라의 문화와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중요하다. 종교를 한 방향으로만 강요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는 언더우드에 대해 "사랑과 진심을 가지고 학교를 만들고 가르쳤다. (조선 땅에) 너무 큰 은혜를 베푼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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