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혜진 논설위원의 청론직설 - 이재원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장
▶ 금리인하로 늘어난 유동성 생산성 높은 쪽으로 흘러가야
▶가계빚 규제 효과 있지만 지켜본 뒤 금리 추가 인하 결정
▶박사급 200명 넘는 한은, 구조 개혁 싱크탱크 역할 적합
▶파격 조치 없으면 저성장 불가피, 지금이 개혁 골든타임
한국은행이 ‘절간같이 조용한 한은사(寺)’에서 ‘시끄러운 한은’으로 바뀌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 취임 이후 통화정책뿐 아니라 구조 개혁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는 등 적극적인 소통 행보에 나선 것이 그 배경이다. 한은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 역할도 자임한 가운데 그 최전선에 이재원 한은 경제연구원장이 있다. 한은 경제연구원이 올해 발표한 ‘입시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 방안 ‘기업 혁신 활동 제고 방안 등에 대한 심층 보고서’ 등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이 원장은 21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통화정책만으로는 경제성장률 추세선의 기울기를 바꿀 수 없다”며 “2040년대 0%로 진입할 잠재성장률의 경로를 바꾸려면 구조 개혁을 위한 파격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절박한 심정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은의 추가 금리 인하 전망과 관련해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부동산 공급 대책 등 ‘거시경제 안정 대책’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돼야 추가 결정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이 국민과의 소통 강화를 위해 새로 마련한 스튜디오에서 이 원장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은이 3년 2개월 만에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한 배경과 이유는 무엇인가.
-근원 물가 상승률이 2% 정도로 둔화되고 기대 인플레이션도 2.8%로 낮아지는 등 지난 3년여 동안 진행된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한숨을 돌렸다. 한은이 미국·유럽 등 주요국 중앙은행에 비해 기준금리를 선제적으로 올린 점이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또 한국형 점도표 도입을 통한 ‘포워드 가이던스(선제적 지침)’를 제시해 기대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됐다. 다만 물가와의 전쟁이 마침표를 찍은 것은 아니다. 중동·우크라이나 등의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른 유가·환율 등의 불안 요소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해야 한다.
▲금리 추가 인하 시기는 언제로 전망하는가.
-금리는 금융통화위원들이 전적으로 결정하기에 내가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이제는 물가와의 전쟁의 다음 단계로 넘어 가야 한다. 집값과 가계부채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내수 경기를 살리는 일은 실은 더 어려운 과정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금리 결정이 이뤄질 것이다. 8월까지는 부채 급증으로 인한 금융 안정 리스크가 중대 변수였다. 지금은 가계부채 관리 정책 및 부동산 공급 대책 등 ‘거시경제 안정 대책’이 잘 작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정부의 대책이 대출 감소와 집값 안정에 효과가 있다면 중앙은행 입장에서 성장을 고려할 여지가 더 커진다. 정부 정책의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효과가 지속될지는 더 기다려봐야 한다.
▲금리 인하 시점을 실기했다는 논란도 있었다.
-동의하기 힘들다. 물가만 놓고 보면 8월에 금리를 내릴 여건이 충분했다. 그러나 가계부채가 월 9조~10조 원씩 늘고 있다는 내부 보고가 있었다. 만약 그때 금리를 내렸다면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꼴이 됐을 것이다. 금리를 낮춰서 성장 모멘텀에 도움이 되려면 늘어난 유동성이 민간소비나 생산성이 높은 부분으로 흘러가야 한다. 그러나 유동성이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부동산 부문으로만 쏠린다면 소비나 성장에 도움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항아리의 구멍을 먼저 메우고 물을 넣어야 물이 차지 않겠나. 이번 금리 인하는 구멍을 메우는 정부의 작업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물을 조금 부어 넣은 것이다. 추가로 새는지 아닌지 확인한 후 다음 금리 결정이 이뤄질 것이다.
▲가계부채 관리를 어떤 식으로 해야 하나.
-우선 범정부 차원의 일관성 있는 관리가 중요하다. 예컨대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정 수준 이내로 관리하는 식의 목표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계부채 수준이 경제 전반의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가계부채가 중대한 문제라는 인식이 전제돼야 부동산을 경기 대응 수단으로 활용하는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차주의 상환 능력 범위 내에서 대출이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
▲내년 경제성장률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는가.
-한은의 공식적인 성장률 전망치는 올해 2.4%, 내년 2.1%다. 내년 성장률이 올해보다는 다소 둔화되겠으나 잠재성장률 수준에는 부합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때 미국의 경기 침체 논쟁이 크게 불거졌지만 최근 나오는 데이터들을 보면 미국 경제는 연착륙할 확률이 높다. 미국 대선이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다. 만약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대중 수출제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 등의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으므로 한국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관세를 인상하면 글로벌 공급망이 교란돼 다시 물가가 오를 여지가 생긴다.
▲실질적인 내수 회복이 좀처럼 되지 않고 있는데.
-내수 회복 지연에는 경기적인 요인 외에 구조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수출은 잘되는데 소비는 부진한 ‘디커플링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수출을 주도하는 반도체 등의 산업은 자본 집약적이어서 노동시장에 낙수 효과가 덜하다. 상승세는 둔화됐지만 여전히 높은 물가 수준도 소비를 제약한다. 비싼 주거비, 농업 분야의 낮은 생산성, 수입 장벽 등으로 생활 물가를 잡기가 쉽지 않다. 구조적인 이유로 인해 높은 물가를 통화정책으로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
▲내수를 활성화하거나 성장률을 높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통화정책은 추세선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한 경제를 다시 그 선상으로 복귀시킬 수 있다. 그러나 통화정책이 경제 추세선의 기울기나 위치를 바꿀 수는 없다. 잠재성장률의 기울기를 가파르게 만들거나 물가를 구조적으로 낮추려면 구조 개혁이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초저출생으로 인해 노동 투입은 갈수록 줄어들기에 잠재성장률을 올릴 방법은 기업의 생산성 제고밖에 없다. 기업 혁신의 바탕이 되는 기초연구의 지출 비중을 늘려야 한다. 또 신생 기업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벤처캐피털 시장을 키워 ‘똑똑한 이단아’들이 혁신 창업가가 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시끄러운 한은’이 됐다는 평가에는 통화정책 외의 보고서들이 한몫을 한다.
-한은이 갑자기 예전과 다른 보고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박사급 인력이 한은 전체에 200명 넘는데 경제연구원에만 약 40명에 달한다. 예전에도 고품질 연구가 이뤄졌으나 내부 참고만 하고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최근에 연구 내용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소통한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인력 풀을 활용해 정책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본다. 경제사회 구조에 대한 연구는 한은뿐 아니라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늘 하는 임무다.
▲‘지역별 대입 비례선발제’나 ‘돌봄 노동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적용’ 등 한은에서 제시한 구조 개선 해법을 둘러싼 논란이 적지 않다.
-한국은 초저출생으로 인해 이대로 가면 잠재성장률이 2040년대부터 0%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 매우 높다. 우리가 구조 개혁 관련 보고서를 계속 내는 것도 지금이 골든타임이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파격적인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급한 심정 때문이다. 이해 당사자들이 많기 때문에 구조 개혁은 정말 쉽지 않다. 개혁 방법론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제시하는 해법이 꼭 정답은 아니다. 다만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해법을 고민한 우리의 보고서를 토대로 사회적 논의가 활성화돼 문제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됐으면 한다.
▲앞으로의 연구 주제와 방향은.
-부동산 쏠림 해소 방안으로 리츠(부동산 투자회사) 활성화에 대한 보고서를 곧 발표하려고 한다. 가계부채를 완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총재도 관심을 갖는 분야다. 또 기후변화가 거시 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중요해질 것으로 본다. 다소 지연되고 있지만 탄소 중립 전환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중요한 과제다. 이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준비하고 있다.
He is…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제학과 수학을 전공하고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럿거스대와 버지니아대에서 교수를 지낸 뒤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로 임용됐다. 미국 세인트루이스연방준비은행 객원연구위원과 미국 댈러스연방준비은행 외부연구위원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거시경제 분야의 전문성과 풍부한 해외 연구 교류 경험을 인정받아 2023년 9월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장으로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