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존자 이경재 씨 인터뷰…떨어진 다리 상판 위에서 구조 활동
▶ “참사 이후 우리 사회 변하지 않아…책임이 더 사라진 것 같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연합뉴스]
"여기저기서 '살려달라'는 비명이 들렸어요. 한 명이라도 더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 처참한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30년 전 성수대교 붕괴 참사 현장에서 목숨을 구한 이경재(51)씨는 희생자 30주기를 사흘 앞둔 지난 18일(이하 한국시간) 연합뉴스와 전화 통화에서 당시의 참상이 떠오르는 듯 몸서리를 쳤다.
1994년 10월 21일은 제49주년 경찰의 날이었다. 서울경찰청 제3기동대 40중대 소속 의경이었던 이씨는 모범 의경으로 뽑혀 표창을 받기 위해 강남구 개포동 시상식장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이씨와 동료 의경 10명이 탄 승합차가 강남 방향 성수대교 가운데쯤 다다른 오전 7시 38분께. 갑자기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들리더니 승합차가 그대로 다리 상판과 함께 떨어졌다.
이씨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물속에 빠지지는 않은 승합차 안에서 밖을 살펴보니 무너진 다리 부분이 한강 위에 둥둥 떠 있었는데, 승합차 바로 옆에는 웬 버스가 처참하게 부서진 채 뒤집혀 있었다. 붕괴 지점을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결국 추락한 16번 시내버스였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이씨를 비롯한 의경들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승합차 밖으로 뛰쳐나가 구조 작업에 나섰다. 옷으로 밧줄을 엮어 물에 빠진 이들과 버스 안에 뒤엉킨 승객들을 구했다.
"구조되신 분들이 비까지 맞으니까 계속 춥다고 하셨어요. 속옷만 남기고 모든 옷을 벗어서 부상자들에게 덮어드렸죠. 조금만 참으라고, 구조대가 오면 이제 괜찮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한 분 한 분씩 돌아가시더라고요."
이씨도 역시 구조 대상이었다. 119 보트에 후송되는 짧은 순간, 의식이 없는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이씨의 눈에 들어왔다. 성수대교 참사는 16번 시내버스에 타고 있던 등굣길 무학여중·고 학생 9명을 비롯해 32명의 사망자와 17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씨를 포함한 의경들은 20여명을 구해낸 공로로 서울경찰청 표창을 받았다. 모두가 '영웅'이라며 이씨를 치켜세웠으나 정작 트라우마 치료와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병원 입원 치료와 열흘 동안의 휴가가 전부였다.
이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처참한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르더라"며 "요즘도 다리를 건너다가 다리가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 들면 도망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조명 인테리어 사업을 하면서도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꺼렸다. 4년 전 고향인 강원 삼척으로 온 뒤에도 단층집만을 고집한다.
이씨는 "사고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오히려 우리 사회에 책임이라는 것이 더 사라진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성수대교 참사 이후 이듬해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참사'(101명 사망)와 '삼풍백화점 붕괴'(502명 사망) 등이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때마다 안전 불감증에 대한 지적이 잇따랐지만 대형 참사는 되풀이됐다.
2022년 10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159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는 이씨에게 특히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씨는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으로 기소된 이들 가운데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과 박희영 용산구청장 등이 잇따라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데 대해 "(참사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성수대교 참사 때는 서울시장이 곧바로 경질됐다. 국무총리는 사표를 냈고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다"면서 "그런데 요즘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사고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하는지 옷 벗는 일도 없다. 책임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씨는 이어 "이름만 '책임자'인 사람들이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데서 사고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며 "잘못한 이들에 대해서는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더 이상 이런 사고가 반복돼서는 안 되고 그게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