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경은 진리이다.”라고 말할 때, 진리의 개념을 객관적 ‘사실’(fact)과 일치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지만, 기록 방식은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통해 계시 받은 하나님의 뜻을 뮈토스(mythos)와 에토스(ethos)의 방식으로 증언한 말씀이다. 뮈토스는 ‘신화’(myth)를 말하고, 에토스는 ‘윤리’(ethics)를 말한다. 성경의 이야기가 뮈토스라면, 율법은 에토스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뮈토스라고 하는데 주저한다. 왜냐하면 신화 (myth)는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건 신화일 뿐이야.”라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이 아니야.” 혹은 “거짓말하지마.”라는 뜻이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라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기록된 ‘트로이 전쟁’은 오랫동안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을 비롯한 고고학자들이 터키 지역의 발굴을 통해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밝혀냈다. 뮈토스, 즉 신화는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인들이 자신들이 경험했던 실제 사건을 기술하는 방식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뮈토스는 허구가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야기와 거기에 결부된 세계관, 인간관을 말해 준다. 예를 들어, 창조 이야기라는 뮈토스는 하나님과 우주에 관한 거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안에 있는 인간의 삶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한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에토스라고 말하는 것도 주저한다. 왜냐하면 윤리(ethics)는 추상적인 의무의 개념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구약의 율법이 제공하는 도덕성을 율법주의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에토스는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자유롭고, 행복하고,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어떻게 살고, 관계하고, 행동하는가에 대해 말한다. 에토스는 이러한 의무와 책임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와 영감들을 포함한다.
구약의 백성들은 한 공동체로서 그 이야기, 즉 뮈토스를 말한다. 기본적인 초점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우주의 창조자다. 인간은 혼돈을 정복하고 삶을 주는 창조적 행위를 이어가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과 질서의 세계에 죽음과 파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과 축복을 베풀고자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억압당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종 되었던 곳과 불의 한 곳에서 해방하며 모세를 통해 그들을 계약을 맺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시는 등, 에토스와 도덕성에 대해 가르치셨다.
우리는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예배, 순종 그리고 경 외심으로 응답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1-12)
‘하나님의 경외’는 단순히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겸손함과 순종을 뜻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관계이다. 그런 점에서 에토스는 서로의 신뢰와 존중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대화(dialogue)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억압과 불의에서 해방하신 것처럼 우리도 불의한 상황들을 종결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는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의 뮈토스며 에토스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정의이시며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평화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