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 신약성경 골로새서 1장 25절에,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직분’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오이코노미아’이다.
개역개정판 이전에 사용한 개역성경에는 오이코노미아를 ‘경륜’으로 번역하였다. 에베소서 1장 9절과 디모데전서 1장 4절에도 오이코노미아가 나오는데, 개역개정판에 모두 ‘경륜’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왜 유독 골로새서 1장 25에서는 ‘오이코노미아’를 ‘직분’으로 번역했을까? 궁금해서 다른 성경들을 찾아 보았더니 공동번역과 새번역 성경에서는 ‘사명’으로 번역되어 있고, 영어 성경에서는 ‘dispensation’(KJV), commission(NIV), stewardship(NASB)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오이코노미아’에서 파생된 영어가 economy(경제)이기 때문에 ‘오이코노미아’는 경제학에서도 많이 다루는 용어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divine plan)을 뜻한다. 그래서 ‘오이코노미아’를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 ‘직분’ 보다는 ‘경륜’ (經綸, dispensation)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하나님의 경륜을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로 정의하면서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계획)과 다스림과 관련해, 세상 만물의 운행과 질서를 주장하시고 온 역사를 주관하시며, 인간 구원의 계획과 실행 등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섭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산다. 시간은 역사를 만들지만,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역사라면,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은 경륜이다. 우리는 한국을 방문할 때 비행기를 타고 간다.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잠을 자거나 신문을 보거나 음식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기도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비행기는 한국을 향해 앞으로 날아가고 있다.
비행기 승객이 무엇을 하든 비행기가 움직이고 있는 것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잠을 자고 일을 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divine plan)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는 것이 은혜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사명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은 순간부터 “아하! 이것이로구나!”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았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바울은 본래 기독교인들을 미워하며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바울은 이방땅 다메섹에 기독교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도 박해하고자 말을 타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음을 깨달았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임을 알았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몰랐을 때는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것이 유대인의 율법에 충실한 것이라고 믿었는데, 자신을 이방인의 선교사로 정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은 후에는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살았다.
모세는 80세에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는 120세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경륜대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하였다.
스위스의 사상가이자 법률가인 칼 힐티(Carl Hilty)는 “태어난 날보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찾은 날이 더 큰 날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살면 삶의 가치관이 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알기에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힘을 다하여 수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