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안의 철학

2024-06-20 (목) 하은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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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사춘기’(Puberty·1894)는 벌거벗은 소녀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긴장된 표정으로 응시하는데 불안에 지배당한 듯 시커먼 그림자가 뒤편에 드리워져 있다. 뭉크 특유의 거칠고 단순한 선으로 사춘기 소녀의 불안과 공포를 표현한 작품이다. 다리를 모은 채 수줍은 포즈로 손을 무릎에 올린 모습이 이 시기 20대 중반이었던 작가 자신의 성적 억압을 반영한다는 해석도 있다.

뭉크는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 이후 이어진 비극적 가족사 탓에 평생 불안증으로 고통을 받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심한 불안감에 시달렸고 이를 예술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해왔을 정도다. 뭉크는 아동기 발달에서 일어난 위험들로 인해 늘 불안해하면서도 예술로 그 감정을 통제해 공포를 이겨냈다. 유명인들 중에는 뭉크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지 않았어도 불안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최고가 아니면 견딜 수 없기에 불안이 생성하는 무한한 에너지를 발전의 동력으로 삼은 경우다.

지난 주말 전 세계 극장가를 장악한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2’는 불안이를 주인공으로 한 사춘기 소녀 라일리의 성장 영화다. ‘Inside Out’이란 제목이 말해주듯 1편부터 마음 속 감정들의 갈등을 시각화해 보여주는데 2편의 핵심 감정은 ‘불안’이다. 1편에서 열한 살이었던 라일리는 5가지 감정을 지닌, 웃고 울고 화를 잘 내는 소심한 까칠 공주였다. 하지만 2년 후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불안이(Anxiety)가 너무 지나쳐서 라일리를 힘들게 한다. 자신이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불균형이다. 자의식이 엄청나게 강해지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면서 부럽이(Envy), 당황이(Embarrassment), 따분이(Ennui)가 찾아온다.


13세 소녀 라일리의 감정 혼란을 다루었지만 중2병 소년도 충분히 공감한다. 특히 프랑스 이름을 붙여준 ‘따분이’(Ennui)는 세상에 무관심한 세기병 환자 흉내를 내는 그 녀석을 연상시킨다. 영화를 보는 내내 푸릇한 수염을 만지며 귀찮은 듯 셀폰만 쳐다보던 녀석이 따분이가 등장하자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기는 걸 보고 혼자서 웃었다.

10대 아들과 딸을 자세히 관찰했다는 켈시 만 감독과 마크 닐슨 프로듀서는 2020년 1월부터 ‘인사이드 아웃 2’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만 감독은 “뇌과학과 사회학적 접근을 하다가 10대 청소년들의 불안이 크게 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어릴 적 나도 분명히 겪었던 감정이 불안이어서 정말 끌렸다. 현대에는 10대 소녀의 불안이 사회적으로 급증하는 추세였다. 그러다가 팬데믹에 접어들었는데 이 ‘불안’이라는 감정이 만연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주제라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10대가 되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엔 쉽게 해결되지 않는 생각과 감정이 있다. 항상 관리하고 대처해야 하는 것들이다. 처음에는 불안을 없애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안이 또한 라일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이기에 없애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데 이르게 된다”고 했다.

감정의 밑바닥을 경험해본 이들이 20년 넘게 추천하는 책,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도 나온다.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불안’을 탐구한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경험하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매우 밀접한 개념이다. 우리의 삶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불안을 맞아들이고, 또 다시 그것을 떨쳐내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풍요의 시대가 욕망을 키웠고 욕망의 이면에 불안이라는 씨앗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순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마음 속은 불안하다. 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과 통하기 때문에 거슬리는 바가 없고 아는 것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진다는데 귀는 순해지지 않고 사사로운 감정에 여전히 얽매인다. 따분한 이야기만 들리고 현 상황은 당황스럽다. 사춘기에는 감정 컨트롤 본부에 비상벨이 울려 철거가 시작되던데 이제는 자기 수용을 통해 콘솔을 다시 축소시켜야할 시기다.

<하은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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