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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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여사를 기대하다

2024-05-20 (월) 나혜경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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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나이니만큼 친구들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자연스레 자녀의 근황을 넘어서 혼인한 자녀의 배우자 즉 며느리나 사위, 사돈들까지를 아우른다. 몇 년 전부터 주변인 자녀들의 혼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을 이어갈 때까지도 당장 나의 일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사연들이 그리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어엿한 시어머니가 되었기에 한번 생각해본다.

K여사, 서부에 사는 아들 집에 남편과 같이 갔다. 아들 부부는 전문직 종사자로 딸 하나를 기르며 신혼살림을 사는 중이었다. K여사 부부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녁식사를 마치자 아들이 “엄마 아빠, 호텔에 방 잡아놨어요. 모셔다 드릴게요.

아무래도 푹 쉬시려면 좁은 집보다 호텔이 나을 것 같아서 예약했어요.” 그러더란다.


아들의 말에 깜짝 놀라다 못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며느리 눈치도 봐야하고 해서 알았다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덧붙이는 말이 “거실에서라도 이부자리 펴고 자고 싶었는데 그 밤에 부모를 호텔에 내려주고 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도무지 내가 키운 아이 같지 않더라.”였다. K여사는 그날 밤 너무 서운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단다.

W여사, 아들 셋을 둔 W여사는 몇 년 전부터 두 형제가 차례로 혼인을 하더니 최근 막내아들이 회사 동료와 연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어 혼사를 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아들 부부와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아들이 한사코 엄마를 잡으며 자기네 집에서 주무시고 가라더란다.

그날 밤에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을 보고 아들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뭘 어떡해? 뿌리치고 운전해서 집에 와서 잤지. 편하게 내 집에서 자지. 그래도 아들이 붙잡으니까 기분은 좋더라구.”

드디어 나, R여사의 차례가 온다. 호텔에 데려다주고 “엄마 안녕!”하고 손 흔들며 뒤돌아설지 W여사네 아들처럼 “엄마, 자고 가.”라고 하며 내 팔을 끌어당길지 알 수 없다.

나를 극진히 대우하느라 자식 네가 불편한데도 억지로 꾹 참으며 도리나 명분을 찾는 방식으로 대한다면 내가 더 불편해질 것 같고, 곧 죽어도 나는 쿨 한 엄마이고 싶으며, 또 자녀들에게는 나름의 사정과 형편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어떤 상황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이 들어보니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때와 시기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창 젊은 자녀들에게 이제 막 시작해가는 그들만의 세상은 또 얼마나 각박할까를 생각하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투정하거나 서운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식은 자식, 부모는 부모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너무 많이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되기가 쉬울까? 아들이 호텔로 이끌면 “오케이!”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발 쭉 뻗고 편하게 자고 자기 집에서 자라고 하면 “콜!” 엄지 척 올리며 잠자리가 다소 불편해도 단잠을 자고 일어나는, 담담하게 이러구러 살아갈 수 있을까? 자칭 쿨한 엄마 R여사에게 기대해도 될까?

<나혜경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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