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는 게 그런 거지 뭐

2024-02-17 (토) 이근혁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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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명품이 하나 생겼다. 여자가 핸드백을 좋아하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좋아하는 것처럼 남자도 좋아하는 게 있다. 여자는 최신 옷이나 구두, 핸드백, 보석이다. 남자는 태생적으로 좋아하는 여자 말고 스포츠카와 명품 시계가 있다. 과시용으로 좋아하는 명품이다.

관우의 적토마가 있고 김유신의 천리마가 있는 것처럼, 남자는 뭔가 타고 달리면서 스릴에 쾌감을 느끼고 과시하며 폼 잡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크고 높고 멀리 달리다가 피곤하면 뒤에서 잠도 잘 수 있는 큰 차를 좋아한다. 가격이 월등하다. 차이가 많이 난다.

여자가 원하는 건 다 사줘도 얼마 안 된다. 스스로 예뻐 보이기 위한 것이든 남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든 비싸봐야 얼마 안 된다. 내 짝은 다행히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서 신발이나 바지를 사이즈를 외워 다니다가 사다 준다. 생색내는데 큰 돈 안 든다.


나도 사치는 없는데 롤렉스시계 하나 갖고 싶었고 차는 미국 차의 명품 캐딜락 에스컬레이드(CADILAC ESCALADE)를 죽기 전에 타보고 싶은데 멀쩡한 차 바꾸는 것도 그렇고 너무 비싸서 못산다.

손주가 태어나니 그 돈 아껴서 손주에게 장난감 사주고 싶고. 결국엔 이리저리 머리 돌리다가 못 사고 마는데 이번 생일에 94세 잡수신 장인한테서 선물로 롤렉스시계를 받았다. 아들이 둘 있는데 큰 사위한테 준 이유는 자신에게 가까이서 잘하는 큰 딸이 고마우니 대신 어려운 큰 사위한테 선물한 게 아닐까 싶다.

시계 내력을 보니 내가 결혼했을 때 연도다. 내 시계를 잃어버렸는데 정말 갖고 싶었던 시계를 선물로 받으니 잠 잘 때도 끼고 잔다. 결혼 시계를 처음 받은 것처럼 좋다. 82년도 시계니 구식 중에 구식이지만 롤렉스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나 차도 사주시면 감사히 타고 다닐 텐데 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나 받으니 두 개 받고 싶다. 그래서 자식한테 함부로 돈 주는 게 아니라고 했나보다. 원래가 무지 짠 분인데 나이를 드시며 슬슬 푸는 건지. 그렇다고 큰돈이 있는 분도 아니다. 나나 마찬가지로 열심히 장사하며 살아오신 분이다. 사위는 평생 남이고 고집 센 사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인지도….

나도 요새는 필리핀 사위 눈치를 본다. 사람 사는 게 늘 처음처럼 일수는 없다. 모든 이에게 처음부터 잘해야 했는데. 시작을 잘하면 나중에도 인격자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못하고 이제야 잘하려 마음먹는 게 변덕인지 처세인지 모르겠다.

사는 게 별거 아니라고 마음 풀어 잘해주고 기분 좋게 물질을 받으니 마음이 한층 간다. 나는 아들을 원했지만 딸만 둘인데 그분은 아들 둘에 딸도 둘이지만 아들만 좋아했다. 적당히 거리 두고 필요할 때만 찾아갔는데 생일 선물로 명품을 받으니 감사의 마음이 우러나는지 마음이 찡하다.

처음부터 잘하지는 못했다. 이제는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는 아들이 없으니 사위 눈치만 조금 보면 되는데 별거 없다. 손주 자주 보며 예뻐해 주고 예쁜 마음 그대로 잘 간직한다면….

사람살이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주고, 나누며, 사는 거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 가까운 사람 사랑하듯, 조금씩 먼 사람, 모르는 사람도 사랑해가면서. 돈도 주고받고 사랑도 주고받으며. 사랑도, 돈도, 돌고 돌고 돌리며 돌다가 때가 되면 갈 때가 되어 가는 거다. 사람 사는 게 그런 거겠지.

<이근혁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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