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메리카 대륙의 세 자매

2024-01-13 (토) 정재욱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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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에 딸만 여섯 있는 집의 큰딸이 있는데 신입생 시절에 대시했다가 차이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그러고도 가까운 친구로 남았으니 서로 좋은 친구는 맞다. 동갑인 내가 그저 애로 보였겠지. 네가 안 되면 둘째 동생, 그러니까 셋째 딸을 소개시켜달라고 했다가 싸늘한 눈빛에 얼어죽을 뻔 했다. 셋째 딸은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더라, 농담이라는 변명은 꺼낼 틈도 없었다.

애 하나 낳고 마는 요즘 같아서야 최진사댁 셋째 딸을 만날래야 만날 도리가 없다. 체홉의 시대에나 먹혔지 이제 ‘세 자매’라는 말도 곧 사라지겠다. 집집마다 화장대에 올려놓았던 못난이 삼형제 인형은 아직도 나오나.

뒷마당에 자라고 있는 호박에게 아침 인사를 하면서 세 자매를 생각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옥수수, 콩, 호박 세 자매(Three Sisters)가 살림 밑천이다. 아니 집안의 기둥이다. 오랜 세월 원주민들이 대지에서 배운 생존의 지혜다.


흔히들 미국 땅은 기름져서 뭘 심어도 크게 잘 자란다고 하는데, 잘 모르면서 하는 말들이다. 원주민들이 살았던 흔적을 보면 가뭄으로 사라진 동네, 마구잡이 화전으로 인구가 확 늘었다가 지력이 미처 회복을 못해 폐허가 된 큰 마을들이 많다고 한다. 세 자매 농법이 자리 잡으면서 안정적으로 번영한 지역들이 나타났다.

세 작물을 함께 심으면 옥수수는 튼튼하게 높게 자라 덩굴식물인 호박과 콩 넝쿨을 지탱해주고, 콩은 공기 중 질소를 뿌리로 보내 땅을 비옥하게 하고, 호박의 넓은 잎은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빛을 차단하고 흙이 마르지 않게 한다. 셋이서 상생하니 따로 따로 재배할 때보다 결실이 더 많다.

셋 중에서 인류가 작물로 키우기는 호박이 첫째라고 한다. 그 큰언니의 이름이 참 애매하다. 임진왜란 뒤에 중국에서 들여와 호박이라는데 조선호박은 뭐고 왜호박은 또 뭐냐. 그렇다고 스쿼시라고 쓰려니 영어도 잘 못하면서 티내는 것 같아 눈치 보이고.

어쨌든 우리 집 호박은 버터넛 스쿼시다. 한국에서도 도입해서 땅콩호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실 뭔지 모르고 심었다. 예쁜 카디널이 보고 싶어서 걔들이 좋아한다는 호박씨를 사서 모이통에 주곤 했는데 그때 남은 거였다. 잎이 우리가 알던 호박잎 치고는 너무 진한 푸른색이어서 갸우뚱, 한동안 화려하게 꽃만 피우고 말아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게 숫꽃들이었다. 어느샌가 바닥에 깔려 작은 암꽃이 피고 씨방 자루가 하루가 다르게 통통하니 호박으로 크고 있다.

호박은 먹는 방식에 따라서도 나뉘는데 애호박으로 먹는 여름호박과 다 자라 단단한 껍질을 까서 속을 먹는 겨울호박(Winter Squash)이 있다. 핼로윈을 장식하는 펌킨이 겨울호박이다.

‘세 자매’에 덧붙여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계로 퍼져나간 ‘삼토’로 마무리하자. 토마토, 포테이토, 토바코.

국어시간에 담바고 타령에서 담배로 넘어가는 외래어로 포르투칼어 타바코(영어는 토바코), 이탈리아 음식에 많이 들어가는 토마토야 당연히 밖에서 들여온 문물인 줄 짐작했지만 김동인의 ‘감자’, 강원도 ‘감자바위’ 때문에 감자 역시 그런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이렇게 옥수수도, 호박도, 감자도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에는 없던 작물이라면 우리네 조상님들은 뭘 드시고 사셨지? 먹는 재미는 없으셨겠다.

<정재욱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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