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코리안 아메리칸 픽션

2024-01-04 (목) 하은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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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해 결심은 ‘책을 먼저 읽자’로 정했다. 500편이 넘는 영화와 시리즈를 봐야한다며 우선 순위에서 점점 멀어진 ‘책 읽기’다. 정독이 힘들면 다독이라도 해야겠다 다짐했다.

제일 먼저 소설가 이창래의 신작 ‘타국에서의 일 년’을 전자책으로 구입했다. 데뷔 이래 처음으로 20대 청년을 등장시킨 색다른 서사이기에 호기심이 동했다. 자신이 속해 있는 현실과 이 세상에 어떠한 소속감도 느끼지 못하는 스무살 청년 틸러 바드먼의 낯선 세계로의 여정에 함께 부유하고 싶었다. ‘My Year Abroad’(2021)라는 원문 소설로 읽어야 이창래의 유려한 문장이 주는 ‘언어의 힘’에 제대로 몰입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번역본을 읽고 있다. 28년 전 그의 첫 장편소설 ‘Native Speaker’(영원한 이방인)를 정독할 때와는 달리 책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된 탓이다. 책장은 잘 넘어가는데 아직 책 소개에 등장하는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는 문구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현대 영미문학의 대가로 평가받는 이창래는 스스로를 어디에도 완벽히 속할 수 없는 ‘경계인’으로서 누구보다 치열히 세상과 부딪혀 온 작가다. 1995년 언어가 상징하는 정체성의 이야기를 담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99년 위안부의 참상에 충격을 받아 ‘A Gesture Life’(척하는 삶)을, 2004년에는 ‘Aloft’(가족)을 출간해 보편적인 주제로 작품 세계를 넓혔다. 한국전을 배경으로 한 ‘The Surrendered’(생존자·2010)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브루터스의 대사에서 따온 ‘On Such a Full Sea’(만조의 바다 위에서·2014)를 발표해 세계 문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타국에서의 일 년’은 그의 여섯 번째 소설이다. 한국인의 피가 8분의 1 섞인 하파이지만 백인으로 살아온 청년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있다.


이창래 작가가 포문을 연 ‘코리안 아메리칸’ 문학은 2018년 출간 이후 밀리언 셀러가 된 ‘파친코’의 이민진 작가에 의해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이민진 작가는 책 제목 ‘파친코’를 두고 도박처럼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뜻함과 동시에 혐오와 편견으로 가득한 타향에서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파친코 사업을 선택해야 했던 자이니치의 비극적 삶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다큐멘터리의 디테일과 뛰어난 소설적 공감이 어우러져 찰스 디킨슨을 연상시키는 스토리텔링이 이민진 작가의 강점이다. 반면에 이창래 작가는 2011년부터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토마스 만처럼 한인 디아스포라 소설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코리안 아메리칸 픽션의 거장이다.

두 작가는 경계인으로서의 날카로운 시선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는 공통점이 있다. 허구의 서사이고 집필기간도 길다.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이민진의 대하소설 ‘파친코’는 2022년 공개된 애플 오리지널 시리즈 시즌 1에 이어 올해 시즌 2가 나올 예정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창래 소설은 영화화되거나 시리즈 제작 결정이 되지 않았다. “넷플릭스 시리즈를 넘어서는 소설”이라는 김연수 작가의 신작 서평에 씁쓸함마저 느껴졌다. 이창래의 연마된 언어 표현을 각색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짐작하면서 문학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현실을 실감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걱정하는 것을 문학에 투영한다는 이창래 작가가 9년 만에 내놓은 신작은 개인의 이야기보다 더 넓은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을 발표했던 2021년 1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창래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를 봤는데 아칸소에 정착하려는 한인 이민자 가족을 묘사하며 인종적 갈등이 거의 없다는 것에 놀랐다”고 밝혔다. 과연 아칸소에는 인종적 갈등이 없었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한 한인 가장에게 인종적 갈등보다는 ‘가족을 향한 의무와 사랑’이 더 중요했던 거다. 가치관이 다른 부모와 자녀 관계가 중요했던 ‘파친코’ 소설처럼 말이다. ‘파친코’를 공동 연출했던 저스틴 전 감독은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지난 10여 년간 코리안 아메리칸 혹은 아시안에 대한 스토리 텔링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과연 이게 필요한가’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왔다”고 했다. 오히려 애써 이렇게 이야기를 한정시키고 그룹핑을 한 후 스토리를 펼치려는 게 아닌가. 그저 이야기가 좋다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나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충분히 공감대를 일으키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거란 고민이었다.

이제 코리안 아메리칸 픽션은 미국 가정, 더 나아가 전 세계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를 담는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삶이 예술적 표현의 대상이 될 가치를 더욱더 높이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하은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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