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음식으로 사람을 알 수 있다’고 그랬다. 최초의 음식평론가인 프랑스의 앙텔름 브리야사바랭(1775~1826)의 말이다. 맞는 말인데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먹지 않는 음식으로 사람을 더 잘 알 수 있게 됐다. 다이어트가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체중 감량 및 유지를 위해 먹지 않는 게 일상적 풍경이 됐다. 다이어트에 대한 사회적 압박이 엄청나다 보니 과체중인 경우‘자기 관리가 안 되는 사람’이란 굴레에 씌우기도 한다. 인류가 오랫동안 식량 걱정을 하며 살아왔음을 감안하면 이는 참으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수렵과 채집이 일반적이었던 시절엔 있으면 먹고 없으면 못 먹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농업이 일반화되고 정착해 살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점차 잉여 식량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염장이나 건조 등을 통해 식량을 보존하는 방법 또한 발맞춰 개발됐다. 이런 인류의 식품 보존 능력은 근현대에 이르러 냉장 및 냉동 기술의 발달과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덕분에 잉여는 일상이 돼 버렸고 인류의 허리둘레는 나날이 늘어나 오늘에 이르렀다.
■다이어트, 2000년의 역사
이런 흐름 속에 다이어트가 근현대의 문화라고 덮어놓고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이미 2,000년 전부터 인류는 과체중과 싸워왔다. 기원전 400년에 히포크라테스는 이미 인간의 건강에 영양과 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제안하는 비결의 일부는 시대를 감안했을 때 당연히 괴상했다. 최대한 딱딱한 침대에서 잔다거나 구토를 유발한다거나 알몸으로 있는 게 건강에 좋다는 내용이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발상에서 엿볼 수 있듯 고대 그리스에서 늘씬함과 건강함의 개념이 처음으로 생겼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믿어 운동을 열심히 했으며 건강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다만 그리스인들은 현대인들처럼 맵시에 집착하기보다 신체적 능력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음식의 선택을 통한 소위 ‘패드 다이어트’(Fad Diet)는 1556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루이지 코르나로는 저서 ‘장수의 예술’에서 매일 음식은 400g을 먹는 대신 와인을 470ml 마시라고 제안했다. 한편 같은 이탈리아에서 출간된 ‘과일, 허브, 채소’(1614)는 영국의 설탕과 고기가 넘쳐나는 식단을 비판했다.
한편, 영국의 의사 조지 체인(1672~1743)은 채식 다이어트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당시 의사들이 그랬듯 자주 동네 술집에 들러 먹고 마시며 환자들과 친목을 도모했다. 그 탓에 체중이 늘고 건강이 악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다이어트는 일종의 락토 베지테리언으로 말 그대로 우유와 채소만을 먹는 식단이었다. 덕분에 체중이 줄고 건강을 회복하자 예전보다는 절제된 일반 식단을 다시 시도했지만 또 체중이 늘었다.
그는 결국 죽을 때까지 우유와 채소만을 먹으며 식단의 장점을 설파하고 ‘건강과 장수에 대한 에세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19세기에 등장한 식초 다이어트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오늘날과 같은 맵시, 즉 시각적 매력 위주의 외모지상주의가 등장했다. 마른 게 미덕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딱 맞는 옷이 유행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최초로 ‘다이어트 인플루언서’가 등장했다. 시인이자 6대 바이런 경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남성으로 꼽혔다.
모두가 동경하는 맵시를 유지하기 위해 바이런 경은 다이어트에 엄청난 신경을 썼다. 단식과 폭식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했고 폭식 뒤엔 옷을 엄청나게 껴입어 땀을 흘림으로써 체중 감량을 시도했다. 그는 오늘날에도 꾸준히 시도되고 있는 식초 다이어트를 고안해 냈다. 식초 탄 물을 마시거나 식초에 담근 감자를 먹는 방식이었다.
영국에서 식초 다이어트가 유행했다면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저탄수화물 다이어트의 개념이 등장했다. 앞서 언급했던 최초의 음식평론가 브리야사바랭은 ‘미식예찬’(1825)에서 ‘비만은 질환이 아니라 생활습관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비만을 피하기 위해 빵, 밀가루와 설탕을 쓴 음식, 전분질의 감자 등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 저탄고지(키토제닉), 앳킨스 다이트 등의 실마리가 됐다.
■씹어라, 빠질 것이다
1900년대로 접어들어서는 좀 더 괴상한 다이어트가 미국과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호레이스 플레처(1849~1919)는 ‘위대한 저작자’(Great Masticator)라는 별명에 맞게 음식을 씹어 삼키는 요령을 다이어트로 포장했다. 모든 음식이 액체가 될 때까지, 적어도 서른두 번 씹은 다음에 삼켜야 한다는 소위 ‘플레처리즘’이었다.
1920년대에는 무려 흡연이 다이어트를 위해 권장되기도 했다. 담배 ‘럭키 스트라이크’의 광고 캠페인 ‘럭키를 찾으세요’에는 체중을 줄인 듯한 여성이 등장해 흡연과의 연관성을 암시했다. ‘살을 찌우는 단 음식 대신 럭키를 찾으세요’라는 광고는 흡연을 권장할 뿐만 아니라 다이어트를 여성의 의무처럼 부각한다는 점에서 끔찍했다.
1930~1950년대는 본격적인 ‘원 푸드 다이어트’의 기간이었다. 말 그대로 한 가지 음식이나 식재료에 초점을 맞추거나 그것만 먹는 다이어트로 첫 주자는 자몽이었다. 매 끼니 단백질 위주의 식단에 자몽을 곁들이는 방식으로 ‘할리우드 다이어트’라고도 불렸는데 1980년대에 다시 인기를 끌었다.
1934년에는 바나나와 저지방 우유 다이어트가 등장했다. 의사 조지 해롭 주니어는 ‘밀워키 저널’에 매일 바나나 네 개와 저지방 우유 석 잔을 먹으면 2주 동안 2~4kg을 감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즘도 ‘마녀 수프’로 꾸준히 인기를 누리는 양배추 수프는 1950년대에 등장했다. 양배추에 토마토, 샐러리 등 열량이 낮은 채소로만 끓이는 이 다이어트 방식은 1980년대에 가수 돌리 파튼의 이름을 업고 한 번, 1995년에 여성지 ‘코스모폴리탄’의 후광을 업고 또 한 번 유행했다. 이 수프로 체중이 줄 수도 있지만 수분과 근육 손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게 함정이었다.
■음식 찾아 먹는 ‘웨이트워처’
1963년에는 ‘웨이트워처’(Weight Watcher)가 출범한다. 평생 체중 관리로 힘들어하던 진 니데치는 친구들과 함께 체중 감량과 관리의 요령을 토의하던 중 웨이트워처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열량 대신 점수를 추적하는 시스템이다. 채소와 과일, 콩류 위주의 건강한 식단을 추구하는 가운데 개인별 목표 점수에 맞춰 음식을 찾아 먹는 방식이다. 웨이트워처는 오늘날 프로그램 구독으로 수익을 내는 상장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설탕 다이어트(설탕으로 식욕을 억제하는 원리), 혈액형 다이어트, 와인과 계란만 먹는 다이어트 등 해괴한 비법 아닌 비법들이 명멸하다가 1990년대 들어 나름 체계적이라고 하는 다이어트가 속속 등장한다.
생화학자 배리 시어스 박사가 고안한 ‘존 다이어트’(Zone Diet·1995)’는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을 각각 40%, 30%, 30%의 비율로 맞춰 먹을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한편, 의사 로버트 앳킨스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앳킨스 다이어트’(Atkins Diet·1998)는 4단계로 나눠 지방과 단백질을 강조한 식단을 통해 체중을 감량하는 게 골자다. 할리우드 스타 킴 카다시안이 감량의 비결로 꼽는 등 오늘날까지도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다이어트다. 많은 양의 단백질을 섭취하면 간에 무리가 가는 등의 부작용이 따르는 게 단점으로 꼽힌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는 통곡물부터 오렌지주스까지 각종 음식을 먹으며 신체를 정화한다는 ‘클렌즈’(2004), 앳킨스 다이어트에서 착안해 지방의 양을 줄인 ‘사우스비치 다이어트’(2003), 간헐적 단식 등과 더불어 여러 양태의 채식이 다이어트의 대세로 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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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