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첩은 마법의 조미료였다. 특히 볶음밥에 끼얹으면 당근과 양파는 물론 밥까지 모든 재료의 맛이 확 살아나는 걸 느꼈다. 확 치고 나오는 단맛이 전부라고 느끼기 쉽지만 찬찬히 음미해보면 다른 맛도 드러났다. 단맛의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신맛과 마지막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감칠맛이 사실은 케첩의 진짜 맛이었다. 하지만 케첩이 좋았던 이유는 단지 맛 때문은 아니었다. 그 진한 붉은색은 또 어떤가? 사실 먹기 전부터, 병에 담겨 있는 모습이 이미 식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케첩은 패스트푸드, 특히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의 단짝으로서 국가를 초월한 식문화의 붙박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온전한 미국의 조미료라 여기기 쉽지만 많은 역사 속 음식이 그렇듯 케첩의 기원도 의외다. 그렇다. 중국이 바로 케첩의 고향이다. 케첩은 어찌하여 중국에서 미국까지 건너간 다음 전 세계로 뻗어나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일까? 과연 우리는 언제부터 케첩을 먹게 된 걸까? 세계 및 한국 케첩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자.
케첩이라면 누구라도 토마토 위주로 만든 걸쭉한 조미료, 또는 소스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원래 케첩은 토마토뿐만 아니라 모든 채소나 과일을 졸여 만든 소스를 의미한다. 전 세계적으로 토마토로 만드는 케첩의 양이 가장 많기 때문에 토마토 케첩으로 각인 및 통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마토 케첩은 어떤 재료로 만드는 걸까? 정확하게 원조는 아니지만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하인즈 케첩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로부터 추출한 농축액, 증류 식초, 설탕, 소금, 양파 가루, 향신료, 자연 조미료’이다.
말하자면 토마토 이전에 케첩이 존재했다. 영국에는 이미 1500년대에 남미를 통해 토마토가 소개되었지만 식재료로 쓰이는 데는 몇백 년이 더 걸렸다. 토마토가 독을 품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먹지 않은 것이다. 토마토의 산성 즙이 백랍 접시의 납을 추출해 중독을 일으키는 사례를 두고 오해한 결과였다.
케첩의 전신은 중국에서 역사가 기원전 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액젓이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생선 내장이나 육류 부산물, 간장으로 담근, 영어식 표현으로 ‘케치압(Koe-Chiap)'이라 불리는 젓갈이 존재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소금을 엄청 써 담근 액젓이다보니 케치압은 긴 항해에 적합한 조미료였다. 덕분에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등으로 퍼져나갔고 영국인들도 1700년대 초반부터 케치압을 접하기 시작한 뒤 본격적으로 변주에 나섰다.
그리하여 18세기는 케첩의 황금시대였다. 요리책에는 굴, 홍합, 버섯, 호두, 레몬, 셀러리, 심지어 자두나 복숭아로 만든 케첩의 레시피가 실렸다. 시럽처럼 끈적해질 때까지 졸이거나 염장해 보관하는 조리법이었다. 어떤 조리법을 채택했든 오래 보관이 가능한, 짭짤하고 화끈한 조미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1812년, 드디어 토마토를 쓴 케첩의 조리법이 등장한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과학자 제임스 미스(James Mease)가 처음으로 고안해 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식초를 쓰지 않아 장기 보관이 쉽지 않았다.
그런 문제를 연륜이 오래되지 않은 식품 회사인 하인즈가 선구자적으로 해결한다. 1876년, 토마토에 양조식초, 흑설탕, 소금과 각종 향신료를 더해 끓인 오늘날의 케첩을 출시한 것이다. 하인즈는 속이 보이는 투명한 유리병에 케첩을 담아내 맛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진한 빨간색을 과시할 뿐만 아니라 신선도 또한 확인하라는 전략이었다. 이처럼 당시에는 유리병이 최첨단이었지만 농도 짙은 케첩을 효과적으로 꺼내는 데는 불편했다. 그리하여 1983년, 케첩을 처음 발표한 지 100년도 더 지나 하인즈는 손으로 쉽게 짤 수 있는 플라스틱 병을 도입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토마토 케첩이 한국에 처음 도입된 건 1930년대 후반이었다. 시기가 그렇다 보니 일본에서 수입해 판매했는데, 신문에 광고가 실릴 만큼 대중적으로 접근했다. 조선일보의 1938년 3월 26일 자 에는 ‘’화식과 양식 모든 요리에 쳐서 맛있게 잡수시오!’라는 문구의 ‘가고메 케첩’ 광고가 실려 있다. 가고메 케첩은 나고야의 아이치 도마도 제주 주식회사의 제품이었다. 토마토 케첩이 1930년대 후반 신문 광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서양식 소스인 가운데 가고메 케첩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시장을 독점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신문에는 케첩을 쓰는 요리 또한 소개되었는데, 특히 오늘날처럼 오므라이스에 곁들이는 방식이었다. ‘양파, 홍무(당근), 감자, 양배추 등을 잘게 썰어 기름에 볶은 후 밥을 넣어 같이 볶는다. 계란을 크게 부쳐 접시에 깔고 볶아 놓은 밥을 계란 위에 부은 후 계란으로 싸고, 토마토 케첩을 쳐서 먹는다 (‘찬밥 처치하기에 좋은 밥 요리 두세가지’, 동아일보 1938년 9월 27일 자)’.
토마토 케첩의 존재감은 해방 후에도 딱히 시들지 않는데, 수입품과 국내 생산품이 공존했다. 동아일보 1968년 6월 11일 자 ‘불요불급 논쟁 수입억제와 배경’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수입산은 백화점 등에서 판매되는 고급품이었다. 반면 국산은 품질에 문제가 많았으니, 밀가루나 인체에 유해한 색소를 쓴 가짜 혹은 불량품이 단속되기도 했다. 매일경제 1969년 8월 20일 자 ‘밀가루로 만든 토마토 케첩에 쇠고랑 유해 색소로 눈가림’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해로운 유해색소와 밀가루를 쓴 서울식품공업사, 도양식품공업사, 창희식품의 토마토 케첩이 단속됐다.
그런 가운데 1971년 8월, 오뚜기가 케첩의 국내 제조를 발표했다. 1979년 11월 앞서 언급한 일본의 가고메 케첩과 기술을 제휴해 1980년부터 국제 규격으로 생산하겠다는 요지였다. 기술제휴에는 비용이 들지만 덕분에 국산 케첩의 품질이 높아질 수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4개사가 케첩 시장에 추가로 뛰어들었다.
케첩이 차츰 한국인의 식탁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오뚜기 포함 5개사가 1982년 기록한 매출액은 총 100억 원에 이르렀다. 그런 가운데 1983년에는 미원과 미국 CPC사의 합작회사인 한국크노르도 가세, 6월부터 토마토 케첩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케첩의 판매 경쟁이 치열해졌지만 핵심 원료인 토마토는 국산이 아니었다. 국산 토마토는 생식용이다 보니 케첩 생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1983년 농촌진흥청이 ‘원교 401’라는 품종을 개발해 발표했다. 케첩 및 가공용 토마토로서 받침대를 세우지 않아도 재배가 가능한 품종이었다.
한편 제조사인 오뚜기도 충북 제천의 농장에서 자체적으로 토마토를 재배해 300톤을 수확했다. 농촌진흥청은 원교 401호 이후에도 ‘적풍’과 ‘홍조’라는 품종을 개발해 농축 토마토의 98%에 이르는 수입산 비율을 줄이려 시도했다. 적풍은 대세였던 일본 품종 ‘마쓰라 2호’에 비해 수확량이 많고 당도는 비슷해 1986년부터 농가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 토마토 케첩은 현역 조미료로서 어떤 다른 제품도 따라갈 수 없는 위상을 누리고 있다. 양식이 주식도 아닌 우리의 경우만 보더라도 실감할 수 있다. 지난 50년 동안 오뚜기의 판매량만 놓고 보더라도 141만 톤, 300그램 튜브형 제품으로 환산하면 47억 개에 달한다. 국민 1인당 약 91개의 튜브를 먹은 셈이다. 세계 케첩 시장 점유율 70%인 하인즈가 1985년, 서울식품과 합작으로 국내 시장을 노린 바 있다. 그 탓에 오뚜기의 점유율이 크게 떨어졌고, 마케팅을 통해 회복시키는 데 5년이 걸렸다. 현재 오뚜기 케첩의 점유율은 80% 수준인 가운데 카레와 더불어 최근 판매량이 하락세이다.
※참고문헌: 해방 이후 생산된 국산 토마토 케첩(강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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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