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한 정치인이 “무운을 빈다”는 말을 했다가 난처해진 적이 있다고 한다. “왜 운이 없기를 바라느냐”고 항의하는 젊은이들 때문이었다. 어느 유명인이 ‘숙환’으로 숨진 뒤 이 단어가 포탈 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숙환’의 뜻을 한글 세대가 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말과 같은 것 중 하나가 ‘수재의연금’이 아닐까 싶다. 요즘처럼 큰 태풍이 한국을 휩쓸고 지나가면 여기 한인 언론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던 것이 수재의연금이었다. ‘무운’을 모르고 ‘숙환’을 모르는 세대가 이 뜻을 알까. 언제부터 인지, 오래된 이 수재의연금 모금 관행은 해외에서도 사라졌다.
다음 날 ‘미국사람’과 약속이 잡혀 있으면 전날 저녁부터 김치를 조심하던 때가 있었다. 냄새 걱정 때문이었다. 여행하면서 한국 음식을 만들게 되면 아이들 눈치를 봐야 했던 부모도 있었을 것이다. 냄새 난다며 아이들이 질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냄새나는 한국음식을 미국사람들이 찾고 있다. 타운 식당에서 타 인종 손님들이 주문하는 한식 메뉴를 보면 불고기, 갈비 수준을 벗어난 지 오래다.
세월이 많이 바뀌긴 했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연로한 부모님을 양로병원에 모시고 있다면 코리언이냐며 괜히 반가워하는 양로병원 직원을 본 적이 있는 지 모르겠다. 필리핀계 간호사 등 특히 동남아 쪽 직원들이 모르는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느끼던 때가 엊그제였다. 연례행사처럼 개고기 이야기가 나오고, 북핵과 미사일 보도가 한반도 뉴스의 전부인양 미국 언론을 장식하던 때, 굳이 남북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미국인들은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동네 공원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이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는 않지만 이런 화제는 피해가고 싶었던 게 사실이다.
그랬던 코리아가 알게 모르게 ‘프리미엄’으로 바뀌고 있다. 프리미엄은 그냥 있는데 가치가 올라 가는 것, 웃돈이 얹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일을 경험하면 기분이 생각보다 근사하다. 한국문화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퍼져 나가고, 지난 주에는 ‘오겜’이 에미상 6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도 성큼 도약한 것은 반갑고 기쁜 일이다. 친정이 잘 되면 보태 주는 것 없어도 괜히 든든하고 어깨가 펴지는 것처럼.
그런데 여기에 예외는 있다. 짐작하시겠지만 한국 정치다. 새 정부가 들어선지 넉 달이 지났다. 데자 뷰라고 하나,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메뉴가 좀 바뀌긴 했으나 들어가는 재료나 조리법 등은 달라진 게 없다.
얼마 전 한 그룹 캠핑장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이번 여름방학에 한국을 다녀온 LA초등학생에게 한 어른이 짓궂은 질문을 했다. “미국이 잘 사는 것 같애, 한국이 잘 사는 것 같애?” “한국이요”. 동심의 대답을 놓고 여기 사는 어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래, 요즘 한국이 확실히 좋아지긴 했어.” “오랜만에 미국서 손녀 왔다고 할머니가 또 얼마나 잘해 줬겠어”.
나와 사는 사람들은 코리아 달라진 것을 이제 피부로 느끼는데 안에 있으면 그렇지 않은 건지, 새 정부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보면 지난 세월 한국민들은 나쁜 나라에서 사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다. 아무리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가 정치의 기본 문법이라고 해도 도가 넘으면 역풍을 맞게 된다. 국민의식이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정권이 엎어지는 혁명 같은 변혁을 여러 번 경험했다. 학생 의거, 군부 쿠데타, 촛불 혁명까지. 그럼에도 사회는 한 번의 혁명으로 바뀌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강고하게 남아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촛불 혁명은 매번 또 그렇게 내세울 일인가. 국민이 제 손으로 뽑아 세운 정권이 약속된 임기도 못 채운 채 무너져야 했던 나라. 직전 대통령 두 사람이 모두 감옥에 가 있어야 했던 한국적 상황이 밖에서는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법치국가라고 하지만 너도, 나도 불법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아 법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판단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정의는 법 밖의 어떤 것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결국 힘이나 세력에 의해서 일 것이다. 한국의 지금 정치상황은 그렇게 보인다. 그런 사회가 괴물 검찰을 키웠다. 검찰력은 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고, 정권도 바꿨다. 한국 검찰은 그 힘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최근의 ‘이준석 사태’가 관심을 끈다. 시시콜콜 정치적 내용은 잘 모르나 “고쳐 쓸 수 없다면, 바꿔 써야 한다”는 물갈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지금의 한국은 그동안 정치를 외면하고, 팔짱 끼고 있던 때묻지 않은 건전한 상식들이 현실 정치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 이른바 보수, 진보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한국의 여야는 많이 다른가. 젓가락 두 짝으로 보인다.
여당 전대표의 성상납 건? 그건 별개 문제다.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이런 시도들은 계속돼야 한다. 한국 정치가 변하려면 이 말고 다른 해결책이 언뜻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무수한 성상납을 향유했던 어느 전직 대통령도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경제적 업적은 역사의 평가를 받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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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