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망각과 기억에 관한 명상과도 같은 그리스 영화

2022-06-24 (금)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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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지나야 영화의 의미와 감정을 마음 깊이 느낄수 있어

망각과 기억에 관한 명상과도 같은 그리스 영화

아리스가 카세트의 지시에 따라 자전거를 타고 있다.

기억과 정체성, 상실과 슬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희망에 관한 명상과도 같은 작품으로 그리스영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시달리고 있는 요즘 시의에 잘 맞는 영화로 약간 환상적이요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지녔다. 크리스토스 니코우의 감독(공동 각본) 데뷔작으로 간교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신선하고 총명한데 시치미를 뚝 뗀 바짝 마른 유머를 갖추고 있는데도 보고 있으면 애잔한 비감에 젖게 된다. 그렇게 쉽게 좋아하고 받아들여질 영화는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서 또 마음 문을 열고 보면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야 작품의 의미와 감정을 마음 깊이 감지하게 될 작품이다.

영화는 처음에 망치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소리는 망치 소리가 아니라 주인공 아리스(아리스 세르베탈리스)가 자기 이마로 벽을 두드리는 소리다. 과묵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아리스는 외출해 버스에 탔다가 종점에 와서 운전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을 한다. 갑자기 사람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아리스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아리스는 자기 이름과 신원 그리고 집주소를 비롯해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아리스는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정부기관의 의료원에 수용되는데 이 기억상실증은 치료가 안 된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가족이 찾아와 데려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의료원에 신세를 져야한다. 아리스에게 담당자가 찾아와 의료원에서 계속해 살든지 아니면 새롭게 자신의 정체와 신원을 갖든지 양자택일하라고 제시한다. 아리스는 새 신원을 갖기로 한다. 정부가 마련해준 아파트에 살면서 그가 새 신원을 갖기 위해서 할 일은 의료원에서 준 카세트의 지시대로 하는 것. 그리고 그에 따라 하는 행동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야 한다. 때는 아날로그 시대다.


아리스는 지시에 따라 자전거도 타고 또 스트립 바에 들러 여자로부터 랩 댄싱 서비스도 받는다. 영화의 제목은 아리스가 유난히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이기 때문이다. 카세트의 지시대로 하면서 열심히 새 신원을 갖춰가는 아리스가어느 날 카세트의 지시에 따라 극장엘 갔다가 자기와 같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새 신원을 갖춰가는 안나(소피아 게오르고바실리)를 만나 가까워진다. 그리고 어느 날 안나의 아파트에 들렀다가 안나에게 주어진 카세트를 트니...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춰 살아가는 개성을 상실한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이기도 하면서 아울러 요즘의 셀피 문화에 대한 조롱이기도 한데 과연 아리스는 기억을 상실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과거를 망각하고 싶은 것인가. 기억이란 귀중한 것이지만 때로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한 기억보다 망각을 더 원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아리스 세르베탈리스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착 가라앉은 연기를 아주 잘 한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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