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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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에 ‘포도주의 날’… 와인 강소국, 몰도바

2022-04-27 (수) 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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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실의 역사 속 와인

우크라이나 와인 칼럼을 쓸 때였다.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사이에 낀 작은 나라 몰도바가 눈에 띄었다. 수많은 와인에 이끌려 여러 나라를 들여다보았지만, 그날 하필 몰도바가 필자의 눈에 도드라져 보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인연이랄까, 몇 해 전 와인을 강의하던 자리였다. 문외한 시절 필자에게 와인의 맛을 감칠맛 나게 전해준 만화책‘신의 물방울’에서 본 와인을 실제로 만났다.‘피노누아 드 푸카리.’ 몰도바 와인이었다. 마침 수입사 대표가 수강생으로 참여한 덕분이었다. 와인을 알고서부터 구세계(서유럽) 와인을 시작으로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신세계 와인으로 경험을 넓혔다. 몇 해 전부터는 아시아, 트랜스 코카시아, 동유럽 와인을 눈여겨보았으나, 몰도바 와인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 “영국 왕실에서 사랑하는 숨은 명주”

푸카리(Purcari)는 몰도바 최초의 와이너리로 1827년에 세워졌다. 예의 책에 “영국 왕실에서 사랑하는 몰도바 공화국의 숨은 명주”라 소개할 만큼 유명하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레드 와인(네그루 드 푸카리)은 1878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빅토리아 여왕 때부터 푸카리는 영국 왕실에 납품되고 있다.


알고 보니 이미 우리나라에도 몰도바 와인이 수입되는 참이었다. 소믈리에나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세미나나 시음회가 여러 차례 열렸단다. 수입사 대표는 푸카리 와이너리 그룹에 속한 보스타반의 와인도 수입한다고 했다.

맛을 보았다. 과연 책 내용이 과장이 아니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한 번 맺으면 인연이 되는 법일까. 겨우내 숨죽였다가 때를 만나 움트는 싹처럼, 몰도바 와인은 필자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움이 돋았다.

이태 전 아이스와인 칼럼을 준비하면서 몰도바에서도 아이스와인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음회에 참여해 와인도 맛보았다. 시음장에는 ‘라다치니’와 ‘아스코니’ 와이너리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놓여 있었다.

리슬링, 뮈스카, 카베르네 소비뇽 등 여러 품종으로 빚은 아이스와인의 맛은, 한마디로 좋았다. 놀라운 건 가격이었다. ‘아이스드’ 와인(인공으로 얼려 만든 와인)이 아니라 정통 아이스와인인데도 독일, 캐나다 와인 가격의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인건비가 낮다고 해도 유구한 역사와 우수한 양조 노하우를 가진 몰도바의 와인이 그 가격이라니!

■한국의 ‘몰도바 와인 클럽’을 아시나요

몇 해 전 초청을 받아 몰도바공화국에 다녀온 ‘와인 오피니언 리더’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특히 아시아와인트로피 디렉터인 박찬준 대표는 몰도바 와인을 해마다 열리는 대전국제와인페스티벌에 초대하고 있다. 2020년에는 ‘몰도바 와인’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전주에서 ‘전주와인문화아카데미’와 와인숍 ‘와인지몽’을 운영하는 박형민 원장과 함께 ‘몰도바와인클럽’을 결성했다. 박 원장은 몰도바의 ‘개라지 와인’이라고 불리는 미니스 테리오스 와이너리의 와인을 맛보고는 수입을 결정했다고 한다. 2022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몰도바 9개 와이너리에서 90여 종의 와인이 들어온다(몰도바와인 한국어 홈페이지 wineofmoldova.co.kr에 와인과 판매처가 잘 정리되어 있다).


지난해에는 카사 비니콜라 루카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몰도바와인소매협회 회장 이온 루카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여러 국제 와인품평회에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한다. 그야말로 몰도바 와인의 홍보대사였다. 그는 언어도 안 통하는 필자에게 자국의 와인을 정말 정성을 다해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카르페 디엠’ 와인 다섯 종도 맛보여주었다. 와인 이름을 들으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전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카르페 디엠의 의미를 물으니 역시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이란다. 이 와인을 수입하는 회사에서는 몰도바 최초의 샤토식 와이너리인 카스텔 미미와 스파클링 와인으로 유명한 크리코바 와이너리의 와인도 들여온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와 함께 유럽의 ‘식량 곡창’

몰도바는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보다 조금 더 큰, 인구 350만 명가량의 소국이다. 15세기 이후로는 주변국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다 베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제국에 속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몰다비아 민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흡수되었으며 곧바로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됐다. 그때 베사라비아의 영토와 달리 드네스트르강 동쪽 지역을 차지했지만, 서쪽 일부는 루마니아에, 북쪽 일부와 흑해와 면한 남쪽은 우크라이나에 내주면서 지금의 국경선이 그어졌다. 그러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다.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수난이 많았기 때문일까, 몰도바 역사를 보자니 약자의 설움이 느껴진다. 우리들이 한반도 지도를 두고 호랑이를 닮았다고 여기듯 몰도바 사람들은 몰도바 지도 모양이 포도송이를 닮았다고 여긴단다. 5,000년이 넘는 와인 역사를 가진 와인의 나라답구나 싶다.

땅이 비옥하고 온화한 대륙성 기후로 날씨가 좋은 몰도바는 농사가 잘된다. 예로부터 우크라이나와 함께 유럽의 식량 창고 역할을 해왔다. 사계절이 있고, 겨울에는 너무 춥지 않으며, 여름에는 너무 덥지 않은 데다 강우량이 적어 포도를 재배하기에 좋은 곳이다. 특히 수확기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포도의 당도와 타닌이 충분히 성숙할 수 있다.

위도는 46~47도로 프랑스 부르고뉴와 같다. 해발 300m 이하 구릉지의 비탈면에서 포도가 재배되는 점 또한 부르고뉴를 닮았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 미국, 독일에 이어 몰도바가 세계에서 네 번째 가는 피노누아 와인 생산지라는 점이 너무나 당연하다. 부르고뉴 토양이 석회질인데 몰도바 토양은 체르노젬이라 불리는 검은 토양이라는 점만 다르다. 재배되는 품종도 다양해 국제 품종, 코카시아 품종, 토착 품종 등 저마다 다른 맛과 향을 지닌 개성을 그대로 담아낸 질 좋은 와인이 생산된다.

■땅의 12분의 1이 포토밭, 10명 중 1명이 와인 작업

몰도바는 국토의 12분의 1이 포도 재배지고 인구의 15%가 와인 관련 일에 종사한다. 인구 대비 포도나무와 와인 종사자가 이토록 많은 나라는 지구상에 몰도바밖에 없다. 국경일에 포도주의 날(National Wine Day)이 있다고 하니 그들의 자부심은 근거 ‘있음’이 분명하다.

현재 몰도바는 세계 20위의 와인 생산국이다. 수출량으로 따지면 세계 12위다. 수출 비율만 놓고 보면 세계 1위다. 2019년 통계에 따르면 몰도바는 생산 와인의 80%를 수출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와인 강소국인 셈이다.

■길이 200㎞ ‘세계 최대 와인 동굴’

몰도바에는 길이와 규모가 세계 1위와 2위인 와인 동굴도 있다. 2005년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긴 밀레스티 미치와 크리코바다. 두 동굴은 국가가 직접 운영하면서 와인도 생산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들 와인이 들어온다.

먼저 밀레스티 미치는 무려 동굴 길이가 200㎞나 된다. 원래는 석회암 광산이었던 곳으로 1969년부터 와이너리를 겸한 저장고로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55㎞에는 약 150만 병의 와인이 보관되어 있다.

지하 60m에는 테이스팅 룸이, 지하 80m에는 와이너리가 시작된 1969년부터 최근 빈티지까지 와인(Golden Collection)이 보관되어 있다. 한 병에 10만 유로나 되는 와인도 있다고 한다. 연중 온도 12~14도에 습도 85~95%를 유지하고 있으니 와인 보관에 최적이다. 워낙 길고 넓어 전기차나 자전거를 이용해 동굴 투어를 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네그레 드 밀레스티 미치 2011’ 빈티지는 2019년 아시아와인트로피, 디켄터 아시아와인어워드,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에서 모두 금메달을 받았다.

크리코바 역시 만만치 않다. 무려 100만 병의 스파클링 와인이 숙성되고 있는데, 전체 동굴 길이가 120㎞나 된다. 이 가운데 80㎞에 130만 병의 와인이 보관되어 있다. 15세기부터 형성된 석회동굴로 2003년 몰도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김성실 시대의창 대표(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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