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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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향기의 기억2

2022-04-13 (수) 신정은(SF 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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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교보문고 앞을 지나다 스쳤던 디올의 향기에 전율을 느끼며 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같은 냄새가 거리를 에워쌌던, 어떤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생의 한 순간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향이 소환하는 기억, 보고 듣는 것이 쉽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과는 달리, 냄새로 상기되는 것은 언어나 사고로 희석되지 않는다.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베어 문 순간, 어릴 적 숙모가 구워주던 마들렌의 향기가 떠올랐던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했고,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향기는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지나간 풍경을 복원하기도 하며, 보이지 않는 냄새로 시간을 연결한다.

남들보다 좀 예민한 후각이어서일까, 나는 향수를 사랑한다. 공기를 타고 흘러오는 재스민, 삼나무, 프렌치 바닐라의 감미로운 향은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나를 유혹하고, 은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빛의 프리즘을 발산하는 향수병은 저마다 독특해서 테두리에 금색의 우아한 구슬이 달려 있는가 하면, 어떤 병은 반짝이는 크리스탈 마개를 쓴 채 신비로운 향을 머금고 있다.

향수의 기원은 향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향료의 사용은, 기원전 4-5천년 전으로 거슬러 간 종교의식에서 비롯된다. 구약의 여러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고대의 향료는, 불에 태워서 향을 내는 훈향이었다. 향연을 통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던 고대의 사람들에게, 향기는 오직 신을 위한 선물이었고, 전능하신 분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소통의 매개체였던 향은, 이집트 문명권을 거쳐 귀족 계급의 기호품이었다가, 대중화가 된 지금은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수많은 향이 넘쳐나고, 많은 사람들이 향수를 사용한다. 향기도 살아있는 것이어서 우리처럼 태어나고 죽는다. 그러나 그르니에가 통찰한 것 같이, 누구에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신비처럼 사람들 곁에 영원히 살아 있는 향기도 있다. “7년이면 마치는 생, 그렇다면 지금까지 향기를 가장 훌륭하게 사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그녀가 뿌린 향기를 들이마시고 있지 않은가?”

노을 진 호숫가로 거센 바람이 불어 오더니, 붉은 하늘을 가린 구름이 한차례 비를 쏟아냈다. 적요가 흐르는 밤, 밤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삶은 안녕하신지, 오늘 하루만이라도 평온하셨는지.

4월의 신성한 밤이 깊어가고 있다.

<신정은(SF 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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